중학교 때쯤 아마 5층짜리 낮은 시영아파트에 살 때인 거 같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니 베란다 유리창이 깨져있었다. . 언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애 둘이 유리를 깼다고 찾아왔더란다. 공 같은 걸 던진 모양이었다. 당사자인 범인은 아주 잘생긴 남자애였는데 장님이었다고 한다. 그 학생이 동생과 와서 사과를 하는데 언니들이 참 불쌍했다고 얘기를 했었다. 미남에다가 눈까지 안보인다니... 그 때는 무엇보다도 나만 그 남자를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본 후 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사뭇 달랐다. 그저 담담했던 대사와 지문의 행간 사이에 저런 화면이 나오다니 ... 좀 놀랐다. 그 신비한 느낌은 단지 이은주라는 배우에게서 묻어 나온 것일까. 


버스 운전기사인 그 남자와 예쁘지만 눈이 안보이는 그녀. 시쳇말로 그림이 된다. 게다가 분위기 까지 사는 것은 이 영화에는 현실과 충돌하는 판타지가 있기 때문이다.


경우(이은주)가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애인이 강의하는 곳을 찾아갈 때부터 영화는 현실을 배반한다. 장님 친구가 없으니 실지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책이나 기타 매체에서 접한 그분들과 그녀 ‘경우’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당당한 그녀는 상담이라는 자기 일도 가지고 있고, 버스가 늦게 오면 기사아저씨에게 호통도 칠 줄도 안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분들은 눈이 예쁘지 않다. 그런데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니는 ‘경우’는 눈까지 이쁘다. 정상인으로 태어났다면 훨씬 맑았을 그분들의 눈이다.


8. 버스 안 - 밤


꽉 막힌 사거리에 서있는 버스 한 대. 

“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

달리는 시내버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스기사, 상현. 대단한 음치지만 내내 흥겨운 표정.


화면 바뀌면, 꽤 헐렁해진 도로를 달리고 있는 버스. 흘러나오는 느끼한 디제이 멘트. 주절주절...

저 멀리, 어두운 거리에 밝게 빛나고 있는, 정류장이 보인다.

정류장에 홀로 서있는 누군가의 실루엣.... 점점 가까워지는 상현의 버스.....

마침내 끼이익..... 버스가 정차하고, 덜컹.... 문이 열리면...드러나는 경우의 모습.


경 우 (문 앞에 다가와) 아저씨. 133번 버스 아닌가요?

상 현 네, 맞습니다.

경 우 (표정변화) 133번 맞아요?

상 현 네.


바둑이를 앞세워 올라타는 경우, 타자마자,


경 우 (버럭)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해요!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요? 

 시골버스도 아니고, 무슨 시내버스가 30분만에 와요!

상 현 (황당한) 차가 막혀서...... 


상현의 말은 듣지 않고 자리로 가는 경우.

룸미러를 통해 경우를 보는 멍한 얼굴의 상현.


경 우 (상현에게) 안가요? 


그제야, 얼른 시선을 거두고 차를 출발시키는 상현. 다시 한번 경우를 본다

여전히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방송


소 리 이어서 계속 노래 듣겠습니다.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조용필의 단발머리 그리고 역시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경우, 앉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더니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룸미러로 흘긋거리는 상현, 문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깜짝 놀라 피하는 상현... 잠시 후, 다시 흘긋거린다

'그대발길이 머무는 곳에...숨결이 느껴지는 곳에...서울의 밤거리를 달리는 상현의 버스

f. o


실제로 영화에서는 133번이 아닌 154번 버스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경우’가 기사아저씨에게 호통치는 이 장면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필시 상현이 한눈에 경우에게 반했으리라.


책, 영화, 만화에서 다루는 로맨스는 사실 여성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돈 많고 멋진 남자와 보잘것 없는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만족을 대신 채워준다. 영화의 어떤 장르보다도 오래된 것이지만 장르적인 관습을 벗어나기 힘들기에 항상 끝이 뻔하다는 온갖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난다면 결말은 두가지다. 사랑을 하거나 헤어지거나. 그래도 우리는 밥맛이 어떤지 알면서도 매일 먹듯이 두 주인공이 어쩌구 저쩌구 할 것 알면서도 묵묵히 그 과정을 지켜보게되는 것이다.



‘품행제로’나 ‘안녕 UFO'는 남자의 시점으로 사랑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뻔할 수 밖에 없는 로맨스를 살짝 비튼다. 여성의 판타지를 대신한다는 목적을 상실하면서 관객수가 적을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지만 약간은 색다른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면에서, 시나리오를 같이 공부하던 한 남학생이 쓴 로맨스를 보면서 던진 한마디가 후회가 되기도 한다. ‘여자들이 이 영화 돈 주고 볼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로 돌아가서 ‘상현’은 뭇여성들의 기대를 저버린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직업도 변변치 않지, 얼굴도 아니지, 남성적이지도 않지... 게다가 착하기까지 하다. 실제로는 정을 주기는 쉬워도 사랑까지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 소위 운명적인 사랑을 하기에는 좀 그런 캐릭터다. 상현이 경우를 좋아한건 그녀가 예뻐서만은 아니리라. 그들의 사랑이 현실에 반하는 두 번째 판타지다.


32. 경우 집 - 낮


분주하게 오가며 이것저것을 치우는 경우.

지나치게 반듯하게-경우만의 식으로- 정돈된 실내를 마치 보이는 듯 자유롭게 오간다.


경 우 미안해. 너 오기로 한 걸 깜박했어. 아직 세수도 안했는데...(히죽.)


입구에 뻘쭘하게 서있는 상현.

어색하지만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 바짝 올려 맨 넥타이... 반듯하게 갈라 넘긴 앞머리...

손에는 가루비누와 화장지, 커다란 수박 한 통이 들려있다.

벌써 상현 앞에 벌렁 드러누워 애교를 부리고 있는 바둑이.


경 우 (환하게 웃으며) 뭐 사왔니?


화면 바뀌면. 테이블에 마주 앉은 상현과 꽁지머리를 질끈 묶은 경우.

피자를 물고 있는 두 사람. 

방안을 둘러보는 상현. 달력 한 장 없는 휑한 벽면.

냉장고에 욕실 타일처럼 반듯하게 붙어있는 사진들을 발견하는 상현.

카메라가 사진들을 훑는다. 유에프오 사진.... 대학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 중 어린 경우가 부모님과 찍은 사진이 눈에 띈다. 외국의 어느 곳인 듯한 배경.

상현에게 와서 피자를 달라고 꼬리치는 바둑이.

경 우 이거 다 먹으면 니가 치워야 된다. 안그러면 개미생겨.


...(중략)...


상 현 (꼴깍... 타이가 답답한 듯 끌어내린다)


잠깐 어두워지는 경우. 그러다 문득,


경 우 ...... 아.

상 현 ......?

경 우 잘됐다. 너 온 김에 목욕하자.

상 현 ?


화면 바뀌면. 욕조에서 발버둥질 치고 있는 바둑이.

팔다리를 돌돌 걷어올린 상현, 물범벅이 돼서 바둑이를 씻기고 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욕조에 매달리는 바둑이. 이내 비눗물을 사방에 턴다.

비누 범벅이 되는 상현, 얼굴에 묻은 비눗물을 닦는 사이. 상현에게 찰싹 안기는 바둑이.


화면 바뀌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상현.

좀 떨어진 곳에 경우도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 음악소리도 없이 조용한 실내.

경우, 갑자기 상현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경우의 갑작스런 행동에 흠칫하는 상현. 

눈을 감고 상현의 머리 냄새를 맡는 경우.

유혹할 의도는 전혀 없는데 그래서 꽤 유혹적인 경우의 작은 표정 변화들...

그 얼굴을 보다가 말다가 보다가 마는 상현.

그 동안 실내가 너무 조용해졌다.... 침묵을 깨는,


...(중략)...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핸디형 녹음기를 찾아내는 경우, 테입을 맨 앞으로 돌린다.


상 현 뭐야?

경 우 녹음기... 나한테는 사진기...

상 현 (녹음기와 경우를 번갈아 보는)

경 우 (버튼을 누르고) 동네 친구 박평구군과 함께하는 첫번째 일요일입니다


상현, 경우를 한 번 보고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녹음기를 상현쪽으로 들고 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

상현, ‘꿈은.....’ 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따라 웃는 경우. 나란히 앉아서 깔깔대며 웃어제끼는 두 사람.

웃다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깊게 숨을 마시는 상현.

경우도 웃다보니 갑자기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가만히 상현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찾고... 입술을 찾고...

그대로 경우를 보는 상현... 가만히 다가가 입을 맞추는 경우....

상현, 뒤로 주춤하다가 같이 다가든다.... 야곰야곰야곰..... 

공허하게 눈을 뜨고있는 경우... 손가락으로 상현의 눈을 가만히 닫는다.

눈을 감은 상현.... 잠시... 살며시 떨어지는 경우... 눈을 뜨는 상현...


경 우 우리... 이래도 되나? 만난지 5일밖에 안됐구...

    아직 서로... 잘 모르구... 그리구...(잠시)... 넌 내가 아무렇지도 않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경우. 

상현... 무슨 말을 해야할지...


경 우 평구야...

상 현 ......

경 우 (얼굴을 감싸쥐며) 으... 쪽팔려라...

상 현 .........

경 우 (피식 웃고) 나 왜 이러지? 너한테 자꾸 실수만 하고...

상 현 .........

경 우 ..... 우리 이렇게 더 있다간 진짜 복잡해지겠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경우. 가는 경우를 보다가...

상현, 그때까지 참았던 숨을 내뱉듯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이사오면서부터 복덕방 할아버지에게 UFO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UFO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그녀의 말에 할아버지는 이쁜 할망구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보이기도 한다. 유도복이며 번개전자 사장이며 복덕방 할아버지며 모두 그녀의 말에 관심을 귀울여 준다. 그녀가 벌이는 깜찍한 UFO 소동에 동네 주민들이 휩쓸리게 되는 것이 세 번째 판타지이다.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위에서 말한 현실에 반하는 것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한 관객의 바람이기도 하고 세상을 따뜻하게 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 수많은 작은 배려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주인공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는 끝내 ‘그녀는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95. 경우의 집 - 새벽


온통 젖어있는 경우의 방. 장판 위로 찰랑찰랑 남아있는 물.

침대에 쓰러지듯 이불을 내려놓는 상현.

거친 호흡. 땀으로 범벅인 얼굴. 힘겹게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보면, 변기 위. 그 자세 그대로 꼼짝 않고 앉은.... 경우.

한동안 보는 상현의 눈빛. 


상 현 ........ 여관으로 가는 게 안 좋겠어.....? 

경 우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상 현 경우야.....

경 우 ...........


아무 반응 없는 경우. 꼭 다문 입술.

상현의 시선에 경우가 꼭 붙들고 있는 핸드폰이 들어온다.

깜빡이는 핸드폰 램프. 그걸 보는 순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현.


상 현 너... 지금 이게 말이 되니?

경 우 ......

상 현 ... 나는... 걱정돼서 잠도 못자고 왔는데...

    이렇게 있을 거면서 너..... 도와달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니?

    너.. 그 사람 다시 만났잖아... 나는 정말... 너... 모르겠어... 

    물 무섭다면서... 싫다면서... 이게 말이 되냐구?!

경 우 .......

상 현 뭐라고 말을 좀 해... 정말 ... 답답하게 그러지 말구! 

경 우 ... 니가 뭘 알어? 니가 날 알어?

상 현 지금 그런 게 중요하니? 중요한건....(멈추는)


경우가 울고 있다.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경우를 보는 상현.


경 우 난 이게 중요해!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난 이게 중요하다구... 말을 하라구? 뭘 말하라구?

    너한테 전화 안했다고 이러는 거니?

상 현 ......

경 우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뭘 말할까?... 난 그냥 이런데...

상 현 ......

경 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전화 했었어... 

    너한테 안한것 뿐이야... 


두 사람 사이. 건널 수 없는 침묵.....

상현의 입가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한숨.

상현, 경우를 보지만..... 고개를 돌린 경우.

상현..... 천천히 돌아선다.

경우의 집을..... 나간다.

꼿꼿한 경우의 얼굴에 굵은 눈물이 떨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부분에 중요한 대사가 더 나온다. 


상현  나한테 전화 안한게 정말 화가나. 난 정말 너 모르겠어.

    도대체 네 마음이 뭐니, 난 뭐냐. 난 뭐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니.

    어떻게 한번도 솔직하지를 않니.


경우  넌 나한테 솔직했어?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뭘 바라는데.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뭘 도와주겠다는 거야. 언제까지 도와주겠다는 거야.

     넌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건데...


영화에서는 ‘경우’가 UFO를 바라는 것은 어린시절의 경험처럼 한 번 더 눈을 떠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경우에게 UFO가 바랄 수 없는 희망이나 보이지 않는 지표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경우’의 UFO는 그냥... 상현의 전인권 반지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취미 같은 거 말이다. 


철지난 'Be the Reds!'를 입은 사람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며 2002년 월드컵 때보다 후의 영화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묘하게도 영화는 더 이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비현실적인 많은 부분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영화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대 초의 우리의 모습을 왜곡하지 않고 잘 그려내고 있다. 동시대를 산 같은 또래만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것들. 


가끔씩 외국영화를 보며 ‘쟤네 왜 저래’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 있었는데... 필시 외국인들이 보면 이해 못할 몇 가지 장면들이 있으리라 지레 짐작하면 기분이 좋다.


마지막으로 요즘에 푹빠져서 보는 ‘그여자’란 드라마에서 언급된 시를 읊으며 상현의 가슴속에 들어왔던 ‘경우’를 추억해 본다.




“나의 꽃 ... 한상경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서가 아니다. .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 속에 이미 피어 있기 때문이다.”




PS : 

고은님이 ‘번지점프를 하다’로 한방에 스타가 되었다면 인터넷 사이트로 스타가 된 분이 있다. 이해준과 이해영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이들의 ‘품행제로’트리트먼트는 작가지망생들이라면 모두 보았을 듯싶다. 가끔 들리는 곳인데 영화만큼이나 신선하다. 

대부분 시나리오 작가들의 필로그라피가 우왕좌왕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그런대로 자기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어 반갑다.


각본: 김지혜, 이해준, 이해영 / 감독:  김진민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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