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는 길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와본것 같은 느낌이 드는가 하면 매일 다니던 길인데도 낯설게 보이기도 한다. 영화로 치면 나는 후자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차우>또한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봤다. 감독의 전작이 <시실리 2km>라서이다.

시실리... 그때까지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선보이지 않았던 혼합장르가 주는 막나가는 분위기를 잘살린 작품으로 기억한다. 호러와 코믹의 장르를 섞으면서 분위기는 블랙코미디정도? <차우> 또한 혼합장르의 성격을 띤다. 국내에서 제작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그 ‘어드벤처’와 액션과 코믹의 믹스매치가 꽤 신선하다. 그래서 이름 한 번 지어봤다. 스파게티 서부극처럼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아 시실리, 삼매리, 등등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뻘짓 좀 많이 하시라고.


#한국적 스파게티의 장르로 부른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재 소재가 다르다. 식인 돼지가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 소재자체가 아주 독창적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와 다른점이 있다. 영화에는 생략된 씬 하나를 보자.


S#41. 삼매리, 목장 풍력 발전소

능선에는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고,
고구마를 들고 서 있는 동네꼬마 덕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갈대밭이 요동치며 ‘크르르..’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덕구의 앞에서 멈춘다. 수풀 사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초록빛 눈.

덕구        와.. 너 진짜 많이 커졌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해.
           
다가서며 수풀 사이로 고구마를 내미는 덕구.

덕구        자, 먹어 얼른.. 네가 좋아하는 밤고구마 야.

멧돼지의 주둥이에 고구마를 들이미는 덕구.
하지만, 냄새를 맡곤 주둥이를 돌리는 멧돼지.

덕구
        왜, 이제 고구마 싫어? 좋아했었잖아..
...(중략)...


그렇다. 영화에서는 식인돼지에게 인성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를 보면 초록빛 눈의 식인돼지가 처음부터 사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산속에 식량이 없어지자 시체를 파먹기 시작하다가 내장맛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초록빛눈은 자기 짝인 암컷 멧돼지로 바비큐 파티를 여는 마을 사람에게 적의를 품고, 새끼 멧돼지에게 강한 부성을 보인다. 이쯤이면 사람이다 싶다.



둘째 장소가 다르다. 어딘가 있을 법한 그야말로 촌구석. 비리도 눈감아 줘야할 것 같은 끈끈한 공동체. 삼매리는 시끌벅적하고 정신산만하지만 그런대로 괜찮다. 오히려 영화후반부가 어드벤처가 되면서 산속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매끈해지는 대신에 조금 식상해진다. 마지막에 공장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극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대신에 신선한 맛이 싹....사라진다. 처음에 좀 후져보이는 그 마을회관이랑 파출소랑... 김순경네 집이랑 주말농장을 잘 이용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좀 든다.

셋째 사람이 다르다. 얘기가 위의 것과 좀 겹치는데 캐릭터 디테일이 괜찮다. 게으른 파출소 소장, 오지랖 넓은 동네이장, 비리의 온상처럼 보이는 곽사장, 있을 법하나 행색이 이상한 미친년 등등. 처음에는 스토리와 상관없는 미친년의 등장에 약간 짜증이 났으나 영화곳곳에 등장하는게 재미가 꽤 쏠쏠하다. 특히 김순경 뒤에서 따라올때는 정말로 웃겼다.

상당수 관객들이 이것저것 막 비벼놓은 것을 불편해 하는데도 용감하게 이렇게 영화를 찍은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다음 작품에 기대를 걸며 인상적인 씬중 하나를 읽고 책을 덮겠다.


 

S#58. 삼매리, 마을회관 안(밤)
...(중략)...
다시 한 번 ‘쿠웅~!’ 소리와 함께 강하게 회관 벽에 부딪치는 무언가.
충격으로 깜박깜박 하던 천정의 백열등이 꺼지고, 암흑이 되는 실내.
그제야 노래를 멈추는 수련. 웅성거리는 사람들..

수련       뭐야?.. 정전이야?

사냥개들을 진정 시키고, 슬며시 엽총으로 손을 가져가는 백포수.

한 순간 흐르는 정적..
백포수 엽총을 집어 드는 순간,
‘콰앙!!!’ 회관 벽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드는 검은 물체.
검은 물체에 들이 받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나동그라 지는 선배.

수련        선배!!!

검은 물체,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하고, 아수라 장이 되는 회관.
날뛰는 검은 물체에 조준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백포수. 스쳐 지나가는 탄환.
검은 물체, 동작을 멈추고 백포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시무시한 짐승의 실루엣이 백포수의 시야에 들어온다.
지옥불 처럼 타 오르는 안광..
어마어마한 모습의 야수를 멍 하니 바라보고 있는 백포수.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백포수 쪽으로 걸어오는 멧돼지.

멧돼지, 백포수를 지나쳐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다.
테이블 위, 새까맣게 탄 암컷을 입에 물고 회관 밖으로 끌고 나가는 멧돼지.
넋이 나간 듯, 암컷을 끌고 가는 멧돼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포수.
...(중략)...

 

 

** 이글은 제가 네이버카페 월간시나리오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9년1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안전하고 확실해야 한다. 배우 이문식씨에게 -


설마 배우가 부끄러움을 탈까 싶었습니다. 암 저건 설정일 거야.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니 역시 그렇더군요. 소년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쳐다보는 당신은 6유형입니다.


자, 이문식씨 당신은 한때 완전히 조화롭고 평화로웠던 세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인이 가진 세계를 믿지 않고 법과 권위의 구조를 통해 그것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나는 확인할 것이다”, “증명하겠다”, “주장하겠다”고 말해왔습니다. 

당신은 가장 보편적인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회사를 다닐 때는 대리급이상의 남자들은 다 6유형뿐이라고 느껴졌으니까요.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긴 하지요. 하지만 자신이 6유형이라고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유형이 다른 유형들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럼 장점부터 말해볼까요? 6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협동적이며 조화를 이루고 믿음직스럽습니다. 또한 대단히 독창적이며 재치가 있으며 익살스러운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문식씨 본인이 코미디 장르에 많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네요. 당신은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며 몸과 영혼을 바칩니다. 좀 부족한 영화지만 <플라이 대디>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딸을 위해서 파이터 훈련을 받는 아빠의 모습속에 잘 드러나 있더군요. 


반대로 이 유형의 사람들은 쉽게 자기 불신에 빠집니다. 그래서 겁 많고 의심이 많아 보이며, 끊임없이 위험을 느낍니다. 태어나서 처음 몇 달 동안 얼마나 많은 걱정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세상은 위험하므로 경계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내적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외부의 어느 곳에서 안전을 구해야 한다’는 식의 태도를 발전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화속 다른 어떤 캐릭터보다도 약한 6유형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황산벌>에서 전쟁에서 패했을 때 멋지게 죽자는 대사를 하면서도 겁먹은 표정을 짓는 백제병사1(거시기)나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에게 취조 당하며 짜져있는 안수가 되어 몸소 용감하고 싶은 약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론 불안에 빠진 당신들은 분열적 상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권위를 숭배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복종하면서도 복종적이지 않고, 공격을 두려워하지만 때론 그들 자신이 대단히 공격적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떤 6유형들의 부모는 감정 조절이 되지 않고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난폭하거나 냉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신은 신뢰감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키워나갈 수 없었습니다. 많은 6유형이 어린시절 뚜렷한 이유도 없이 벌을 받거나 두들겨 맞았습니다. 부모가 그런 식으로 자기 갈등을 해소했기 때문입니다. 아이였던 당신은 미리 보호 조치를 하기 위해서 믿을 만한 보호자를 찾아 나서야 했고, 조금이라도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탐지하거나 적극적으로 예상해야 했습니다. 


3유형이 악명 높은 승리자라면 6유형은 악명 높은 패배자입니다. 그래서 끝에 가서 자신이 패배하는 상황을 조성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비관하고 성공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아서 성공을 ‘우회하며’ 남들에게 성공을 넘겨줍니다. 혹은 도달할 수 없거나 과대망상인 미리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목표를 세웁니다. 스스로 실패자가 되는 대부분의 6유형은 칭찬받는 것을 거북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말 속에 약간의 비판을 섞어야 합니다. 


이런 모든 6유형의 불행을 가져오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공포’ 때문입니다. 공포를 이용해 타인을 통제하기를 원하는 권력가들은 항상 공포에 어울리는 새로운 명칭 ‘충성’이라든가 ‘복종’이라는 이름들을 발견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머릿속에 복종의 미덕을 주입받곤 했으니까요. 



자, 이제 6유형을 결정적으로 이해하려면 공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응에 따라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공포를 느끼는 쪽과 공포에 저항하는 쪽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보통 6유형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성적으로 주의 깊고 주저하며 의심이 많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후자 즉, 공포에 대항하는 6유형은 본인은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구타유발자>의 봉연 같은 경우입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봉연은 폭력적이고 비열하게 행동하는 8유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당신이 그렇게 변한 것은 폭력 때문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폭력에 대한 공포심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공포심을 숨기고자 그렇게 거칠고 폭력적인 나쁜 사람 흉내를 내게 된 것입니다. - 


Watzlawick의 그 유명한 ‘망치 이야기’의 나오는 남자가 바로 이런 6유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당신을 6유형으로 선정한 것은 바로 <구타유발자>의 봉연 때문이었습니다. 봉연은 공포에 저항하는 6유형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안전에 대해서 지나치게 갈망하기 때문에 정통적인 폐쇄적인 체계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전통주의 또는 극단적인 경우 근본주의에 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성숙한 6유형은 계급, 권위, 그리고 안전을 추구합니다. 법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이 당신을 매혹합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 경찰, 탐정소설 작가 혹은 범죄자들은 모두 6유형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그런 이미지 때문에 <공필두> <마파도>의 형사, <공공의 적> <범죄의 재구성>의 범죄자 역할이 잘 어울립니다.



6유형의 방어기제는 ‘투사’입니다. 풍풍한 상상력을 가지고 종종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하죠. 그래서 그 불신은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적의, 혐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타인들에게 투사합니다. <구타유발자>에서 보면 봉연은 불신감을 최대한 증폭시켜서 상대가 하지도 않은 일을 예상하며 분노합니다. 이렇게 공포에 대항하는 6유형은 종종 위험을 무릅쓰는 함정에 빠집니다. 또 다른 유형인 공포를 느끼는 대부분의 6유형은 소심하게 되곤합니다. 두가지 유형 다 모든 권위자를 과대평가하는 동시에 불신합니다. 그래서 아첨을 하고 복종하곤 합니다. 공동체나 집단에 헌신하던 6유형은 자신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반대로 헌신이 반역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런 나약한 6유형이 성숙하게 되면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소심하고 나약했던 당신들은 위기상황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해질 수 있습니다. 그건 일생동안 두려움과 싸웠던 댓가입니다. 당신에게 적절한 충고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뢰’입니다. 특히 먼저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이 성공했던 기억들을 하십시오. 그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9유형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9유형의 평온과 평정은 6유형의 공포에 제일 좋은 약입니다. (반대로 3유형으로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자신을 패배자로 몰아버리는 피가학적인 성향이 성공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3유형의 가학적인 성향으로 변해서 자신의 분노를 남들에게 퍼부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필두>와 <플라이 대디>에서 영화 내용도 좀 그랬지만 당신의 캐릭터 해석에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당신이  슈퍼맨이 되려는 3유형을 어설프게 연기한 게 아닌가 합니다)


다른 유형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많이 언급이 되었군요. 이문식씨 그만큼 6유형이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소지가 많은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 그리고 날개 얘기가 빠질 뻔 했네요. 당신이 생애 초반에 발달시킨 날개는 7번(즐거워야한다)입니다. 숨겨진 5번유형(알아야 한다)을 찾는다면 지적인 역할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로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문식의 필모그래피]


성난 펭귄 (2007) 

구타유발자들 (2006) 

공필두 (2006) 

마파도 2 (2006)

플라이 대디 (2006)

마파도 (2005)

공공의 적 2 (2004) 

달마야, 서울가자 (2004) 

범죄의 재구성 (2004)

어깨동무 (2004) 

황산벌 (2003) 

오! 브라더스 (2003)

역전에 산다 (2003) 

나비 (2003) 

대한민국 헌법제1조 (2003) 

라이터를 켜라 (2002)

일단뛰어 (2002) 

묻지마패밀리 (2002) 

연애소설 (2002) 

공공의 적 (2001)

달마야 놀자 (2001)

봄날은 간다 (2001) 

선물 (2001) 

행복한 장의사 (1999) 

간첩 리철진 (1999) 

비트 (1997) 

초록물고기 (1996)

러브스토리 (1996) 

돈을 갖고 튀어라 (1995) 



PS: 

1. 본문의 에니어그램 이론은 [내 안에 접힌 날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2. 오프모임에서 자신이 몇번 유형인지 잘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답하자면 보통은 근원적인 악이라고 불리는 '에너지'로 판별하는 게 맞습니다. (1번유형부터 순서대로 : 분노, 자만, 거짓, 질투, 탐욕, 두려움, 무절제, 파렴치함, 게으름) 그리고 여러유형에 걸쳐있다는 분이 있는데 그런경우 가운데 유형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가령 5번 7번 8번 성향이 보인다면 6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2번유형이 20%고 3번 유형이 30%정도 된다는 해석은 좋지 않습니다. 딱 한가지를 고를 수 있어야 합니다. 본 성격과 날개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은데 이것 역시 단점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3. 또 역시 오프모임에서 사람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답하기전에 위 질문에는 사람의 성격은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의 기질을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에니어그램에 따른 성격분류의 대전제이기도 합니다. 친절한 2번유형이 독특한 4번유형보다 나아보이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각 유형별로 특수한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서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답하자면 성격은 변할 필요가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선 그걸 인정하고 말하자면 물론 기질은 (내부적인 결심이나 외부의 변화에 의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7년10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홍보대행사에서 일하고 있는 언니가 작년에 개봉한 영화중에서 규모에 비해서 ‘애인’이 성공적인 홍보 사례로 뽑히고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돈을 들이면 광고, 공짜로 기사가 나가면 홍보라는데 이슈거리를 잘 잡아서 언론에는 많이 나갔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매체가 협조적이었으나 역시 흥행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용면에서 좀 아쉬운 작품이지만 연말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것이 가여워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


! 영화가 하나의 문장이라면

영화에 나오는 소품과 배우가 내뱉는 말들은 앞뒤 댓구가 맞기마련이다.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대사들도 나중에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아무리 허접한 영화라도 딱딱 맞는다. ‘애인’은 영화에 뜬금없는 대사와 행동이 많이 있어서 저 씬은 왜 들어내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이 눈에 띄였는데 시나리오를 보니 원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게 영화 하나도 하나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장의 호응’이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것이 한쪽만 들어가면 참 이상하게 짝이 없다. 왜 한쪽만 들어냈을까?


#57. 가라오케

... (중략) ...
남자, 무릎을 꿇으며 여자의 스커트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짧은 신음소리를 내는 여자. 그녀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여자의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 반주 음악과 섞여 묘한 리듬감을 만든다.
이제 반주 음악도 끝나고 여자의 신음소리만 들린다.
여자, 한 손으로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고 1번을 누른다.
플립 창에는 ‘내 사랑’ 이라는 문자와 전화번호가 뜬다.
여자의 핸드폰에 매달린 작은 매듭이 출렁거리고 있다.

여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연하게) ... 어디야..? 나..? (입술을 깨물며) 궁금해..?
    (남자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로 조르며) ...왜 갔어?...

여자, 핸드폰의 송화구를 손가락으로 막으며 숨이 끊어 질 것 같은 신음 소리를 한번 내고
    다시 전화 받는다.

여자    ...아까 왜 갔니?... 나랑 섹스 할 때 좋아? 나랑 섹스 하는 게 재밌니?
    난 재미없어...! ...다, 재미없어...!!

하며 여자 핸드폰 파워를 꺼버린다.
여자, 몸을 일으키는데 남자 화난 표정으로 여자의 몸에서 떨어져 바로 앉는다.
남자의 얼굴은 기묘하게 굳어있다.
여자, 뜨악한 심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가다듬는다.
일순간 방안 가득 냉랭한 기운에 감싸인다.

남자    ...지금까지 나랑 하면서 그 놈 생각했던 거야? ...남편이야?
여자    ...
남자    아님 애인...?
여자    ...좋을 대로 생각해...
남자    ...왜, 그 자식은 이렇게 안 해주니?
여자    (실소) ... 너도 별수 없구나... 너 지금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아니?

여자, 갑자기 가방과 옷을 챙기고 일어서 경멸의 눈동자로 남자를 쏘아보며..

... (중략) ...


위 씬은 아래 씬과 호응을 이루게끔 처음에 설계가 된 것이다. 아래씬은 영화에서는 삭제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위씬에서 ‘너 지금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아니?’란 대사를 지웠어야 한다.
댓구를 이룰 때는 처음에 나오는 행동은 다음에 나오는 것을 위한 장치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쪽만 남은 행동은 목적을 잃고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이 영화에서는 댓구가 되는 대사나 행동들이 몇 번이나 짝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하게 화면만 채우게 되는데 그 점이 좀 아쉽다.


#59. 가라오케 앞

힘없이 돌아오는 남자. 가라오케 앞 조그만 화단 앞에 앉는다.
남자,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을 본다. 착잡하다.
잠시 후 여자가 가라오케에서 나온다. 그녀의 팔엔 남자의 가방이 들려져 있다.
여자,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    ...꼴이 그게 뭐야...?

여자, 걸어와 남자 곁에 다가가 앉는다.

남자    ...왜 왔어...?
여자    내가 내기로 했잖아... 당신 돈 하나도 없잖아...
남자    ...
여자    ...나 안보고 싶었어?
남자    ...
여자    보고 싶었지?
남자    ...지금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아니?

남자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가만히 기댄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앉아있다.



? 남자와 여자

작가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시나리오 자체는 소설식 지문에 낡은 느낌의 대사가 오고간다. 아마도 주위에서 진부하다는 평을 개인적으로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2005년 현재로 좀 더 세련되어 지고 좀 더 현실적으로 바뀌어 다행이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처음에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은 주인공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이름이 없다. 단지 남자 여자로 받아들여진다.

#11. 북 카페 앞

    붙어있는 고은의 시.
    이곳에서 나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나는 당신의 당신입니다. 두 사람의 숲. 헤이리.
    여자와 남자, 그 시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여자    여기... 왠지 마음에 들어요.

    여자, 고개 들어 연못 위에 자리 잡은 나무 한그루를 바라본다.
    고인 물의 파문을 바라보다 문득 묻는 남자.

남자    이름이 뭐예요?
여자    여자요...
남자    예쁘네.
여자    그쪽은요?
남자    남자요.
여자    유치해.

    남자, 웃는다. 여자도 쫓아 웃는다. 


둘이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은 엘리베이터지만, 서로에게 눈길이 간 곳은 거의 반나절을 함께 보낸 파주의 예술가 마을 ‘헤이리’이다. 거기라면 그런 일이 일어난데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딘가 낯설고 휑한 고급스런 공간 말이다. 붕 뜬 것 같은 그 비현실에서 히끄므레하고 젠틀한 멋진 남자를 보게 된다면 어느 여자라도 한번쯤 흔들리지 않을까.

이성으로 강하게 느껴서 원나잇 스탠드를 하게되었겠지만, 아래씬처럼 둘은 그저 서로 ‘놀’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10. 갤러리 내 옹기 전시장

    옹기들이 전시된 곳으로 나오는 여자.
    좁은 복도를 따라 갖가지 옹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여자, 옹기들을 둘러보며 슬쩍 주위를 살펴본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찾고 있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 계단을 올라가 야외카페가 있는 곳으로 나가본다.
    그곳에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의 얼굴에 약간의 낙망한 표정이 스친다.
    그런 여자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잡힌다.
    남자, 이층 전시장 한 곳에서 여자를 지켜보고 있다.
    여자, 천천히 전시장안으로 들어와 진열된 자기들을 보기 시작한다.
    남자, 소리 없이 여자의 옆으로 다가가 선다.

남자    나 찾았어요?

    흠칫 놀란 여자, 순간 옆을 돌아보다가 남자와 몸을 부딪힌다.
    숄더백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남자, 허리를 굽혀 떨어진 백을 주워들고 웃는다.

남자    왜 날 찾으러 다녔죠?
여자    (당황스런 얼굴로 백을 받아든다) ...누가요?
남자    (여자를 빤히 보며) 찾았잖아요. 조금 전에. ...아니예요?
여자    (눈길 피하지 않고) 당신이 날 따라왔었잖아요.

    남자,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는다.
... (중략) ...

남자    뭐 말 안해도 좋아요. 지금부터 뭐할 거죠?
여자    그건 왜요?
남자    놀아요, 우리.
여자    (멈춰 서서 남자를 돌아본다) ...내가 왜 당신이랑 놀아야 되죠?
남자    누구랑 뭘 하고 놀아야 하지? 하는 얼굴이예요, 지금.
    내가 놀아준다니 고맙지 않아요?

    여자, 황당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자    ...항상 그렇게 자신만만해요?
남자    나 약한 남자예요. 거절당하면 울지도 몰라요.

    여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할지 모를 얼굴로 남자의 얼굴을 본다.
    내심 망설이고 있다.

남자    ...이렇게 생각해 보죠... 우리.
    당신은 이곳에 처음 왔어요... 낯선 길이죠... 조금은 두려울지도 몰라요.
    난 이곳에 마지막으로 왔죠... 내일 이곳을 떠나니까요...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예요.
    이곳에서 당신과 내가 만났어요. 여기 마지막으로 온 나와 여기 처음인 당신...
    하루의 인연치곤 꽤 괜찮은 인연이지 않나요?
    근사한 여행의 길친구를 만나는 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천구백팔십사만배쯤 행복한 일이죠.

    여자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내 감춘다.

... (중략) ...


남자건 여자건 상대방이 마음에 들 때는 분명히 외모 중에 한군데 이상이 좋아 보인다. 그것이 넓대대한 등짝이든 귀여운 코끝이든 못생긴 둘째 발가락이든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작업 거는 남자의 그럴듯한 변명으로 그녀의 발목이 나온다. 평범하면서도 살짝 웃음이 나온다. 이래서 손목하고 발목이 가는 여자가 한 없이 부럽더라...




#33. 숲속

    한적한 숲길로 접어드는 둘..
... (중략) ...

여자    저기 좀 앉자.. 발이 아퍼.

    여자, 풀밭에 앉아 발을 꼭 죄고 있는 높은 샌들을 푼다.
    남자, 여자의 발로 손을 뻗는다.

남자    어디 봐.
여자    만지지마.
남자    ...괜찮아.

    남자, 여자의 발을 잡더니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한다.
    여자, 역시 조금 쑥스러운 듯 발을 뺀다.

여자    그만해... 괜찮아.
남자    (놓지 않고)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왜 술 마시자고 했는지 물었었지?
    당신 발목 때문이야. 잡아보고 싶었어.
여자    (웃는) 웃긴다.

    남자, 웃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여자의 발목을 손으로 동그랗게 잡아본다.
    여자, 웃음을 그치고 그런 남자를 가만히 본다.
    순간 장난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보는 남자.

남자    근데 당신 그 말, 진짜야?
여자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자, 흘겨보며 발목을 뺀다.
    남자, 웃으며 다시 잡는다. 여자 다시 발목을 빼려한다.
    놓지 않는 남자. 그대로 그녀 위로 올라가 그녀를 덮쳐버린다.
    깔깔거리며 웃다가 서로를 마주보는 남자와 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렬히 키스한다.
    여자, 입술을 떼고 열에 들뜬 얼굴로 남자를 바라본다.

여자    정말 미치겠다... 나 오늘 왜 이러니...
    머리는 이러면 안돼 하는데..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입이 저절로 움직여..
    정신을 차려보면 몸이 막 움직이고 있고.. 입이 아무거나 말하고 있어..
    당신... 누구야?
남자    (물끄러미 보다가) ...당신은 누군데?

    여자, 피식 웃는다.
... (중략) ...


그들은 왜 서로에게 이끌리는가. 영화는 그것이 여자이고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 무엇이 더 필요하랴?


, 욕망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여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논해보려고 한다. 참 원론적인 이야기고 또 말하기 촌스런 주제이지만 그래도 말해야겠다.

‘애인’의 주인공은 ‘여자’이다. 그녀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이끌려 하루를 보내면서 섹스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얘기도 한다. 그녀는 조금 있으면 결혼을 할 예정이고 차림새와 말 본새를 보면 중상층의 보통여자다. 직장은 다니지 않는 것 같지만 매듭공예를 취미나 혹은 업으로 할 정도로 자기 일은 있고, 아무 때나 어느 남자라도 좋다는 여자는 아니다.

영화에서는 키가 크고 미인인 여배우가 나와서 ‘심심해서 죽겠으니 나랑 좀 하자’는 식으로 그림이 나오고 있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가 된다. 게다가 화면은 그녀의 몸을 관찰하고 있다.

카메라가 그 대상을 비추고 있다고 손 치더라도 적어도 시나리오는 그 여자의 ‘몸’을 흝어내리고 있으면 안된다고 본다. 쾌락의 대상인 그녀가 아닌, 쾌락을 느끼는 혹은 느끼고 싶어하는 그녀를 그려야 한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는 아름답게 느끼는 그녀의 발목을 비출게 아니라 그 남자의 넓은 가슴과 따뜻하고 커다란 손을 응시했어야 한다. 그녀가 삶의 권태이든 외로움이든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는 그 열망이 시나리오 어디에도 없다.


#3. 엘리베이터 앞

    걸어온 여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른다.
    그때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위에 덮여진다.
    흠칫 놀라 손가락을 빼고 서로 멋쩍은 목례를 나누는 여자와 남자.
    여자와 남자,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들이 있는 곳은 29층이다. 엘리베이터는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남자, 여행 팜플릿을 뒤적이다가 흘끗 여자를 본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희고 단아한 이마.. 오만한 듯 꼭 다물린 산호빛 입술.. 가늘고 흰 목선과 끝까지     단추를 잠근 하얀 블라우스.. 봉긋한 가슴.. 타이트한 치마선을 따라 드러나는 부드러운 힙.. 희고 매    끈한 종아리를 지나.. 가느다란 하얀 발목에 멈춘다.

    여자, 무표정하게 서 있는 듯 하지만 남자를 의식한다. 
    두 개쯤 단추가 풀린 흰 셔츠에 편안한 면바지.. 맨발에 갈색 가죽샌들..
    근육이 적당히 솟은 팔뚝..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 손에 든 여행 팜플릿..
    남자가 든 여행 팜플릿엔 파란 하늘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 팜플릿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여자의 시선.. 
    남자의 시선이 흘끗 여자의 시선을 향한다.

    여자,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다.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옅은 한숨을 내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바깥 전망이 보이는 엘리베이터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여자, 잰걸음으로 먼저 타고 지하3층을 누른다. 남자도 천천히 따라 탄다.


처음으로 영화를 찍는 것은 작가의 머릿속이다. 필름만 넣지 않았지 누구라도 자신만의 영화를 찍는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시나리오를 받아든 투자자들도 배우들도 자신만의 영화를 머리로 찍는다.

욕망의 대상으로만 비춰진다는 것. 특히 카메라가 그런 관습을 깨뜨리는 것은 쉽지 않다. 완성물의 시선이 바뀌더라도 처음 시나리오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작가의 머릿속을 탓할 밖에...

반대로 카메라는 정말로 여자만 좋아하는 ‘남성성’을 가지는가? 그렇다면 왜 로맨스나 멜로 영화의 카메라는 여성의 몸을 비추지 않고 멋진 남성을 바라보는가.    

결과물을 보면 만드는 사람들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영화 ‘애인’은 ‘남성’관객을 겨냥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85. 해장국집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감자탕 냄비를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남자, 여자의 앞으로 수저를 꺼내 놓는다.
여자는 벽에 기대앉아 멍하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 여자에게 물을 따라주려 물병을 드는데 물이 차다.

남자    여기, 따뜻한 물 한잔만 주세요... (하며 자기 잔엔 찬물을 따른다.)

... (중략) ...

여자    당신하곤 친구 안해.
남자    왜?

여자, 먹던 수저를 놓는다. 그리고 남자를 빤히 본다.

여자    당신... 그런 여자 있어?
    너무 좋아서...미치게 좋아서...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
남자    ...
여자    나... 좋은 남자에 대한 추억 하나쯤 갖고 싶어...
    너무 좋아서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남자 말이야.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죽을 때도...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는... 그런 남자...

남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여자    당신도 좋은 여자, 추억 하나 쯤은 갖고 싶지 않아?...
    난 당신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자    (여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당신 정말 나쁜 여자다...
여자    ...어... 나 나쁜 년이야...

여자, 눈물이 나려하자 얼른 시선을 내리고 다시 감자탕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수저를 멈춘 채...

여자    당신 아까 나한테 실수했다...?
남자    ...?
여자    따뜻한 물만 안 챙겨 줬어도... 다시 만나자고 했을때 그러자고 했을지도 몰라...
남자    ...
여자    (혼잣말처럼) ...정말이지... 쿨 해지기 힘들다...

여자, 그리곤 다시 감자탕을 먹기 시작한다.

여자    이 집 감자탕 정말 맛있네... 그렇지 않아요?

남자, 여자의 갑작스런 높임말에 뜨악한 심정이 되어 여자를 바라본다. <music in>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감자탕만 열심히 먹는다.
카메라, 밖에서 감자탕 집을 비춘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 말없이 감자탕만 먹고 있다.


영화는 멜로영화를 표방하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줄거리와 내용에 불구하고 마치 성인 남성을 위한 ‘에로물’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내 남자 모르게 하나쯤 갖고 싶은 愛人”이라는 영화의 한줄 카피가 참 아쉽다.


감독: 김태은/ 각본: 윤창훈 / 각색: 김민주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3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알아야한다- 배우 이나영씨에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영화 리스트를 훑어봐도 없다. 어째서 5유형 배우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지적인 사람. 지적인 남자. 지적인 여자. 그렇게 연상을 해보다가 나영씨가 떠올랐다.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그녀의 성격이 완전히 드러난 거 같지가 않았다. 딱히 5유형인지 아닌지 조차 헷갈렸다. 흠... 그러다가 <아유레디>란 영화를 찾아 볼 일이 있었는데 머리가 나쁜 관계로 비디오 제목이 비슷한 <후아유>로 빌려왔다. 유레카! 세상에 5유형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나영씨를 발견했다.


5,6,7 유형은 머리 중심의 인간이다. 행동보다는 생각을 중요시하며 “나는 어디에 있는가” 또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묻는다. 5유형은 내부로 들어가 마음속에서 외부 세계에서 거절당한 스스로 거절한 권력을 찾으려고 한다. 8유형이 그것을 폭력과 혁명으로 쟁취하려는 것과 달리 이들은 기다리며 배움으로써 정복하려고 한다. 

이들의 최초로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공허감’이었다. 그래서 충족을 갈망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남들이 원하지 않는 존재’란 경험을 한다고 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설정이 딱 들어맞는다. “못된 기집애. 내가 지를 어떻게 낳았는데, 너 낳느라고 피아노도 포기하고 내 인생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는데, 나쁜 기집애.” 그뿐이 아니다. 유정(이나영)의 엄마처럼 지나치게 속박하거나 강압적인 부모를 가졌을 때 자녀는 5유형이 되기 쉽다. 이들이 내면세계로 들어간 것은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자유공간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영화속처럼 어릴 때 따스한 애정과 다정한 접촉을 거의 받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2유형이 주려는 충동이 강하다면 5유형은 갖고자 하는 충동이 강하게 된다. 특히 이들의 에너지가 눈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들은 흔히 안경을 쓰고 있다. 


감정과 사건에 말려가는 것을 싫어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 이들이 분노에 차있는지 사랑에 빠져있는지 알아채기 어렵다. 특히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야단법석’떠는 것을 질색하고, 그러다가 종내에는 자기감정을 드러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4유형처럼 현재 자신의 옆에 없는 사람에게 더 따뜻한 감정을 품기 때문에 친구나 애인들은 당사자가 자기에게 큰 관심이 없다고 느낀다. 

5유형은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끼면 못견뎌한다. 누군가 그들이 ‘한마디’ 해주기를 바란다고 느끼면 바로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이웃하는 4유형이 튀어 보이려고 그 난리는 치는 것과 달리.. 이들은 ‘투명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후아유>에는 이런 욕구가 적나라하게 나타나있다. “투명인간 친구란 말 알아? 전화도, 만나는 것도 안돼. 보이지도 않아. 하지만 언제나 옆에 있어, 그래서 힘이 되는 친구...” 서인주(이나영)가 가상의 인물에게 혹한 것은 이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싶다. 


슬프게도 이들은 ‘더불어 나눈다’든가 ‘의사소통한다’는 말을 싫어한다. 모임에서 의견교환을 하자면 침울해지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되고 피할 수 없는 경우에도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기다린다. 슬픈 사실 한 가지는 5유형은 부모 역할을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시간과 공간 에너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데 개인적인 5유형은 그걸 견디기 힘들다. 침입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보통은 소극적으로 보이는 5유형이 화내는 걸 보고 싶다면, 노크하지 않고 5유형의 방으로 불쑥 들어가면 된다. 



한 1년 정도 같은 작업실을 쓴 사람 중에 5유형이 있었다. 그 언니는 닮고 싶을 정도로 상당히 멋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스타일이라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뭔가를 묻는척하면서 전화를 하곤 한다. 보고 싶을 때도 둘이 만나지 않고 꼭 모임을 끼어서 만나거나 했다. 언니에게 미안하지만 친해지고 싶어서 에니어그램의 충고에 따라서 나는 그녀에게 직접 접근하는 방식을 피해왔다. 이 글을 읽는다면 날 죽이려 들겠지?


그들에게 다가갈 때 주의할 3가지 사항이 있다. 주도권잡기, 지속적인 육체적 접근, 완전한 복종을 기대하지 말 것. 이것이 <후아유>의 인주가 형태와 친해질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인주는 형태와 통신상에서 아바타로 먼저 교류를 한 것이다. 형태 입장에서는 가상공간의 ‘멜로’라는 인물과 현실세계의 ‘형태’가 동일인물인 것을 알릴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기도 하고 그렇다. 극의 클라이막스에서 인주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5유형답게 바로 도망친다. “그만 도망가...내가 가줄께...그만 하자.” 형태는 그녀가 누구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던 거 같다. 바로 이런 ‘후퇴’와 ‘거리두기’가 5유형의 방어기제이다. 미성숙한 5유형은 의존상태를 유발하는 감정, 섹스, 친분관계에서 도망친다.


까다로와보이지만 이들은 소박한 사람들이다. 많은 5유형은 무엇인가 바라보고 있는 것 -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것 - 보다 이 세상에서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게 앉아 휴식을 취하고 누구도 이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5유형의 에너지이자 근원적인 유혹은 ‘지식’이다. 끊임없이 찾지만 정보량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학위 또 다른 세미나 또 다른 책을 필요로 한다. 인상과 지식을 저장하는 과정에서 특히 5유형은 여행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면 좋은 충고는 ‘지혜’다. 지혜는 그들이 그토록 갖기 원하는 지식의 또다른 형태, 즉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5유형들은 모든 다른 유형보다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보아야 한다. 사랑은 많은 5유형들에게 극적인 사건이다. 성적 매력에 이끌려서 가까워지려는 열망과 거리두기를 원하는 열망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유정을 보자. 그녀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것이 애정이었듯이 그녀 또한 남에게 쉽게 애정을 주지 못한다. 5유형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정을 쏟고 마음을 주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나영씨 경우에 작품편수가 적어서 캐릭터가 확실히 보이지는 않는다(이것은 은둔하려는 5번유형의 특성이 발현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괴짜처럼 보이는 기운을 발산하는 그녀는 양 유형 날개(4번, 6번 유형)가 약간씩 모두 보인다. 양 날개가 다 보이는 사람이 흔치는 않은데 이나영씨의 경우는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배우로써 변화를 시도하고 싶다면 아주 퇴폐적이고 신비한 역을 해볼 것(4유형)과 호러영화에서 희생자 역할(6유형)을 해볼 것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표를 참고 해보면, 이나영씨를 비롯한 5유형들은 8유형으로 가는 것이 좋다. 지식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단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5유형은 이제 무언가 수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으며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이미 자신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안에 숨어있던 5유형이 현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그들이 7유형으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 미성숙한 5유형이 보이는 자폐적인 특징이 7유형의 꿈속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다’며 일탈과 쾌락을 추구하며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할 소지가 있다.)

지혜롭고 총명한 당신 이나영씨 권투를 빌겠습니다.



[이나영의 필모그래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006) - 문유정

아는 여자 (2004) - 한이연

영어완전정복 (2003) - 나영주

후아유 (2002) - 서인주

천사몽 (2001) - 쇼쇼



PS: 본문의 에니어그램 이론은 [내 안에 접힌 날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7년8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한국의 연쇄살인

지지난 토요일에 “한국 살인사건의 유형분석”이란 주제로 황순일(경찰종합학교 수사학과) 교수님의 강의가 있어서 소재나 건져볼까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네오이마주 필진모임을 배신하고 충무로로 발길을 향했다.

우선 고대봉사건(1963년)이나 우범곤(1982년) 사건은 대표적인 연속살인 사건으로 피해자만 각각 6명과 56명이나 되었다. 이들 사건은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 지고 나름대로 살인 동기가 있었던 사건이다.

연쇄살인은 년대별로 대표적인 것을 사건일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김대두사건(1970년대), 김선자사건(1980년대), 경기남부연쇄살인사건(일명 화성연쇄살인. 86년부터 10년간), 지존파사건(1990년대) 은 연쇄살인에 속하는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뚜렷한 동기가 없이 가차 없이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연쇄살인이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2건이상(미국은 3건으로 잡는다고 한다)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개개의 사건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차(심리적 냉각기)가 있고 범죄수법은 늘 유사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범인은 가능한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일부러 특별한 것을 남기기도 한다고 한다. 피해자와 안면이 없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한다.

수법이 제일 끔찍한 것은 김대두사건이었는데 거의 엽기호러영화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임산부와 노약자를 위해서 방법은 설명하지 않겠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어이 없이 죽은 것은 우범곤사건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탄을 가진 경찰이 이유 없이 비무장상태의 마을 사람을 해쳤기 때문이다.



2. ‘혈의 누’는 과연 연쇄살인인가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연쇄살인의 형태를 취하는데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첫 번째, 살인자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사건을 벌인게 아니기 때문이다. 죽어간 사람은 과거의 특정한 일에 연관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미 목표를 정하고 시작했다.

두 번째, 개별 사건이 띄엄띄엄 일어난 것은, 적절한 기회를 봐서 계속 사람을 죽인 것이지 범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심리적 냉각기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세 번째,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개별사건의 시간을 좀 더 단축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선은 이러한 세가지 이유로 난 이 영화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쇄살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3. <혈의 누> 사건일지


- 1808년, 섬 동화도
- 나흘간 효시, 육장, 도모지, 석형에 의해 4명 살해. 살인 미수 1건(거열)
- 방화 조사로 원규, 최차사, 장 호방 등 외부 수사 인원 투입하여 조사 중
  연쇄살인 발생. 수사 5일째 범인 생포에 실패. 본 사건관련자 2명 사망. 1명 자살.

- 독극물 검사로 용의자를 검거했으나 연이어 살인사건 발생
- 첫 번째 용의자의 죽음으로 강객주 사건을 조사하게 됨.
- 두 번째 용의자 추적중 범인의 단서를 잡고 마지막 범행지를 알아냄
- 범인은 검거중 사살당하고 두 번째 용의자는 마을사람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함


4. 시나리오의 아쉬움

사극과 스릴러의 조합. 전혀 안 어울리면서도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지는 두 장르.

먼저 사극이란 장르적 측면에서 조사도 많이하고 군데군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다섯 가지 형벌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신선한 감이 있었고,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생각했던 진상품인 한지가 공장식으로 경영되었던 것이 놀랍기도 하고 흥미가 있었다.

볼거리란 측면에서 혹은 소재적인 측면에서 사극이란 장점은 잘 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후자 스릴러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아쉬운 면이 많이 있다. 스릴러의 주요 재미인, 범인을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쉽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섬에서 일어났던 ‘강객주 일가 몰살’에 관해서도 사람의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는 것부터다 문제다. 이 영화가 사극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허술하게 느껴졌을 것인가. 영상은 흠잡을 데 없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으나 역시 이야기 전개방식에 문제가 있다.


 1.프롤로그

밝은 달이 보인다.
이윽고 엷은 바람이 찰랑이면 하늘 위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달빛.
비로소 물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임이 드러난다.
화면, 초조하게 흔들리는 달을 잠시 동안 바라보는데…….
순간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화면 안으로 확! 떨어져 들어오는 한 여인의 얼굴!
산산이 조각나 버린 달빛을 뒤로 한 채 서서히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여인.
작은 봇짐 하나를 품에 꼭 안고는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인의 창백한 얼굴…….

<FLASH BACK>

누군가에게 쫓겨 허억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의 힘을 다해 숲 속을 내달리는 여인.
사방을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온 몸을 긁어대지만,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앞을 향해 달려간다.
필사의 힘을 다해 끝까지 내달리다가 한순간 우뚝, 제자리에 멈추어 서는 여인.
산의 가장 끝자락, 절벽에 당도해버린 것이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있는 절벽을 감싸고 있는 검은 바다가 보인다.
절망한 듯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마는 여인.
탕!
한순간 울려 퍼지는 총성.

<다시 고요한 물 속>

여인의 곱고 하얀 얼굴 어디에선가 붉은 기운이 번져 나오기 시작하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여인을 지나 붉은 기운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부상하면…….
톡, 톡……. 수면에 떨어지고 있는 붉은 빗방울.
붉게 물들어버린 바다 위의 비.
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피와 붉은 비가 얽혀 서서히 글자가 되어간다.

혈(血)의 누(淚)


읽으면서 대체로 느끼는 것은 시작부터 꽉차있다는 것이다. 스릴러란 장르를 생각하면 구성을 앞뒤가 딱딱 맞게 해야 영화가 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짐작하건데 구성이 너무 꽉꽉차서 나중에 이야기를 고칠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싶다.

첫 화면은 슬픈 느낌을 주며 잔인한 살인들 뒤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14.당산나무 언덕 앞 (오후)

화면 가득 보이는 무원록의 시형도 몸의 각 부위를 표시해 놓은 인체 모형도.
시형도에는 앞면 쉰다섯 곳, 뒷면 스물  여섯 곳 등 모두 일흔 아홉 곳에 각 부분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안경을 쓰고 무원록을 바라보는 원규, 
상 위엔 김이 펄펄 오르는 조협수(소독제)가 사발에 담겨 있고,
망치, 물그릇, 소금, 식초, 밥, 술, 닭 등 응용법물(검시 도구)과 황종척(검험에 사용되는 자)이  놓여있다.
원규, 무원록을 덮는데 남 의원, 화첩을 손에 든 두호, 또 다른 두 명이 장막 안으로 들어온다.

장 호방
의원 남 가 입니다.
그리고 제지소에서 염료 일을 하는 두호라 하온데, 검시화를 그릴 것입니다.

원규에게 예를 취하는 의원과 두호, 두 사람(오작, 항인).

남 의원
(오작과 항인을 가리키고) 이 자들이 시장을 작성할 것입니다.
원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시작하게.

면을 조협수에 담갔다가 시체를 닦기 시작하는 오작.
항인은 황종척으로 시신의 죽창 찔린 부위 등을 재며 시장(검시기록)을 작성해 나간다.
두호는 종이에 시신의 상태를 세밀히 그리고
시형도를 토대로 시체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원규와 남 의원.

원규
피살자는 어떤 자였나?
장 호방(E)
장학수라는 자로 그 처가 병이 들어 오래 앓다가 죽었습니다. 오랜 병에 지극 정성으로 처를 구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그 처가 죽고 나서는 사람이 아주 달라져 하라는 일은 게을리 하면서 매일 투전판이나 기웃거리고 술에 취해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대동 굿을 하던 날도 선원들과 어울려 투전을 했다고 합니다.

오작과 항인이 항아리 속에 면을 넣어 술과 초로 적시더니 시신의 온 몸에 바른다.
시신의 몸 위에 천을 덮고는 다시 그 위에 면을 짜내 술과 초를 적시는 오작과 항인.
의원이 시신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원규가 탁자 위의 은비녀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종이를 뭉쳐 입 안으로 쑤셔 넣는 오작.

원규
피살자를 마지막으로 본 자가 누군지는 수소문해 보았나?
장 호방
예, 집에도 가지 않은 것 같고 선부장과 다툰 이후 만났다는 자가 없습니다.

잠시 후, 종이를 빼내고는 은비녀를 입에서 꺼내는 원규.
보면, 시커멓게 변해 있는 은비녀!
원규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야기 흐름과는 무관하지만, 시체를 검시하는 장면에서 지적인 호기심이 일고 그 생경한 장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작가가 자료조사에 지쳐서 이야기 꾸미는 데까지는 정신을 못 쓴 듯도 싶다.

24.창고 안 (밤)

어둠 속에서 구석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고 안.
소형 추(수갑)로 손이 뒤로 차여진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독기.
수척한 모습이지만 그 눈빛만은 매섭다.
철컹! 출입문이 열리더니 안으로 들어오는 호방.
입구를 살짝 살피고는 독기에게 다가간다.

독기
호장 어른!
장 호방
(나지막이) 내, 좀 전에야 자세히 들었다.
그 일 때문에 학수 놈을 없앤 것이냐?
독기
그 놈 입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소.
장 호방
그러게 어쩌자고 너희들끼리 일을 치룬 거야?
그리고 죽은 놈한테 죽창은 왜 꽂았냐?
독기
술에 독을 탄 것은 나지만
(답답한 듯 나직이 분을 삼키며) 내가 왜 그 딴 짓을 했겠소?
장 호방
(불안해지는) 네가 꽂은 게 아니라고?
독기
(목소리 바르르 떨리며) 대동 굿 때 만신의 목소리 그건 분명 강 객주의 목소리였소.
거기다가 혈우를 보았다는 소문까지…….
(호방을 바라보며 다급히) 어서 이 섬에서 나가게 해 주시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소.
장 호방
잘 들어! 어차피 내일이면 감영으로 호송될 거다.
내가 감영의 아전들에게 손을 써서 무슨 수를 마련해 볼 테니 입조심해라.
감영에서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나를 믿고 절대 입을 열어선 안 될 것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창고를 나가는 호방.
뭔가 궁리하는 듯 눈을 날카롭게 뜨고 이를 악무는 독기.

위 24씬에서보면, 장객주의 원한이라는 섬주민들의 동요에 대해서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다섯사람 - 즉 연쇄적으로 살해당한 - 의 이야기가 여기부터 현실적이지 않다. 피해자들은 살인자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야 했고, 섬을 빠져나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영화의 몇몇 중요 전환점을 놓치면서 이야기가 단선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36.허씨 집 마당

원규가 허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대청에서는 허씨의 처와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다.

원규
강 객주 일가가 처형될 때 두호는 어땠나?
허 씨
글쎄요. 두호는 도통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지고 그저 강 객주가 살던 집을 지키며 살 뿐입니다.

방에서 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던 허씨의 처가 방 안으로 들어간다.

원규
(방을 보며) 걱정이 많겠네.
허 씨
멀쩡하던 노인네가 강 객주 죽은 뒤로 정신을 놔버렸습니다.
원규
강 객주가 죽은 후? 왜? 강 객주 사건과 무슨 관계라도 있었던 건가?
허 씨
(놀라 손을 내 저으며) 아닙니다요. 나으리.
원규
그리 겁낼 거 없네.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허 씨
(눈치를 살피며) 그런 게 아니옵니다. 소인의 아비가 객주 살아생전에 크게 덕을 입은 일이 있사온데 한을 품고 죽은 객주가 해코지 하는 거라고들 합니다.
허 서방
(문을 박차고 나오며) 야! 이놈들아! 혈우가 내렸어. 객주께서 오신다! 이런 천벌 받을 놈들아. (허공에 연신 절을 하며) 객주 어른 잘못했습니다. 객주 어른…….
허 씨
(벌떡 일어나며) 아이고 아버지. 왜 또 그러슈. 왜 또-

허 서방과 허 씨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가만히 일어나 마당을 나서는 원규

원규가 조사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객주 사건이었다. 사실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조치일 수도 있다. 범인은 강객주 사건을 조사하길 바랬고 수사는 충실히 범인의 의도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강객주 일가 모함 사건’의 복수를 가장한 다른 범행일 수도 있었는데 수사 초기부터 혈우니 뭐니 하면서 섬의 분위기에 휩싸인 것은 방법이 좋지 않다. 다행히 진짜로 범인이 그 사건의 복수자라니 말 다했지만. 범인이 위 씬의 허사방이나 허씨였다면 혹은 처음에 잡혀온 독기였다면 어땠을까?

45.인권 처소 방 안 (아침)

높이 솟은 전각 마루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원규와 인권.
‘경염정(景濂亭)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마다 주렴이 걸려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마당은 아늑하고 잘 만들어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연꽃이 피었다.
수박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은 소리도 청명하다.

< 第 四 日 >

다탁을 내려놓고는 다기와 다반을 정성스레 상 위에 올리는 계집 종.
낡았으나 정갈하고 품위 있는 물건들이다.
다기에 차를 따른 뒤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가는 여종.
한쪽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잘 정리된 책들을 둘러보는 원규.
책장에 기대어있는 거문고가 인상적이다.

...(중략)...

인권
나으리의 선친께서 내셨던 문제, 제가 그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주는 한 섬도 가져가서는 안 되겠지요.
원규
그렇습니다.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 죽을 판일 테니 지주는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인권
(비웃 듯 바라보다) 하지만 난.  (순간 표정 매서워지고)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자비를 베푼다면 그 다음 흉년엔 곳간까지 열어달라고 할겁니다. 강한 자에겐 한 없이 비굴하고, 강한 자가 빈틈을 보이면 그 골수까지 파먹으려 드는 것이 저들의 마음이지요.
원규
인심은 위험한 것이라 과불급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동요하고 있을 때 몰아세운다면 민심을 수습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인권
뭍의 방식으로 모든 걸 판단하지 마십시오. 조공이 늦어지면 문책을 당하는 건 제지소의 주인인 영감이십니다. (부적 뭉치를 꺼내 놓으며) 일을 못하겠다고 버티던 자들이 제지소에 붙이려던 겁니다. 귀신이 두려워 무당에게나 몰려다니는 무지한 것들을 예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원규
(지지 않으려는) 범인을 잡으면 주민들의 동요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인권
(비웃듯) 다섯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입니까?
원규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찡그리고)  …….
인권
(잠시 표정 누그러뜨리고 다시 예의를 깍듯이 갖춰) 제지소의 초지공들은 제 방법대로 다스릴 테니 나으리께서는 그만 범인을 찾는데 매진하시지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범인은 죽은 애인에 대한 원한으로 사람들을 하나씩 처단하면서 이곳 섬마을의 인심( 강한자에게 비굴하고 약해진 자의 골수까지 파먹는다 )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자기 변명을 한다. 영화는 아래씬처럼 그의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말 말도 안되는 클라이막스를 맞는데 정말 끔찍하다.

103.제지소 앞

검은 구름 탓에 칠흑같이 어두워진 제지소 앞.
사령들, 목 뒤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홍사령을 업고 나온다.
그 뒤를 이어, 두호를 부축해 밖으로 끌고 나오는 사령들.
눈물을 흘리듯 제지소 벽의 나무 결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원규가 제지소 밖으로 걸어 나가자,
제지소를 빙- 둘러싼 채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는 마을 사람들.
손에는 낫이나 칼 등의 흉기가 들려 있다!
위기감을 느끼고 칼을 빼어드는 사령들, 사람들을 막아서는데,
자리에 멈춰 서서 두호를 주시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

원규
(무섭게 외치는) 뭣들 하는 짓인가! 물러서라!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두호가 죽어야 객주의 원혼이 분노를 가라앉힐 겁니다.
원규
(얼굴 무섭게 일그러지고) 이 자가 죽는다고 모든 것이 용서될 거라 생각하나?
너희들도 이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분노하는) 정작 객주가 모함을 받았을 때는 돈 몇 푼 때문에 외면했던 자들이 이제
다른 이의 피로 용서를 구하려 드는구나.
어서 길을 터라!

수발총을 그들에게 겨누는 원규.
흉기를 손에 쥔 채 살기 띈 눈빛으로 다가오는 주민들.
분노한 얼굴로 무리를 겨누고 있는 원규의 총 끝이 가늘게 떨려오고…….
그런 원규의 얼굴 위로 인권의 소리가 들린다.

인권(E)
쏴라! 네 손에 내 피를 묻혀라.
그러면 네 애비가 그랬듯이 앞으로 그 손에 더 많은 자의 피가 묻을 것이다.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에게 내 주시오.

원규가 망설이는 사이 사령들에게 쌓여있던 두호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사령들을 밀어내고 주민들 앞으로 나서는 두호.
두호를 끌어내리는 사람들.
사령들이 막아 보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광기에 쌓인 주민들에게 밀려나기만 한다.
쑥- 두호의 몸에 칼을 꽂는 허씨.
이내 사방에서 두호에게 달려드는 주민들.
낫과…… 죽창과…… 칼과…… 온갖 흉기들을 닥치는 대로 꽂아댄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힌다.
온 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서는 계속 두호를 난자하는 사람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하는 두호.
두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하늘로 솟았다가 비처럼 쏟아진다.
톡, 원규의 옷자락에 떨어지는 붉은 피.
툭 툭, 사람들의 얼굴 위로.
툭 툭 툭, 사령들의 옷자락에도 붉은 기운이 스며들고.
원규, 놀란 눈으로 하늘을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붉은 피!
마치 화폭에 붉은 물감이 뿌려지듯 서서히 붉게 채색돼 가는 사람들의 모습.
넋이 나가서 서 있는 원규와 광기와 공포에 빠져 있는 사람들…….
더 이상 볼 수 없는 듯, 고개를 돌리는 원규.


5. 살인자의 마음

영화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살인을 기대하는 작가나 감독 등등을 제외하고 살인자 자신을 생각해 보자.

김대두사건의 경우 범인이 체격이 작아 희생자의 반격우려가 있어 죽일 때 확실하게 처리한다는 것이 수법이 점점 잔인해지고 스타일화 되었다고 한다. 경기남부 연쇄살인의 경우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 잔인한 살인행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란 책에서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살인이 미친놈들이나 저지르는 것이 아닌, 이기적인 이유이든 혹은 유희적인 살인이든 개인적인 복수든 스타가 되고 싶은 욕망이든 그들이 인간의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니.

물론 저자는 짐승들은 그런식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저지른다는 측면에서 발언을 한 것이다.

살인자도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니. 정말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다.

각본: 이원재 / 감독: 김대승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황순일 2018.10.14 23:0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기사 검색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글을 남깁니다. 지금은 정년퇴임하고 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덕분에 다른 유익한 글들을 봅니다. 늘 건강다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황순일드림


주위에서 그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은 사람이 많을수록 더 찾기 쉽다. 어딜가나 눈에 뜨이는 특별한 그들. 전형적인 그들 중의 한 명은 故 이은주씨다. 우수에 젖은 눈빛 자기 연민의 그 신비한 느낌. 그들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언뜻 보면 평범한 외모를 가진 문소리씨다. 언젠가 모감독이 인터뷰에서 그녀가 인형처럼 예쁜 배우는 아니라고 했었다. 어째 여배우에게 저런 말을 했을까. 그 감독은 배우 문소리의 진가를 모르는 것 같다. 비록 사석에서 만난적은 없지만 분명히 그녀에게는 남다른 것이 있다. 얼굴만 예쁘장해서 아무 개성도 없는 배우랑은 다르다. 


<박하사탕>, <가족의 탄생>, <효자동 이발사>처럼 참한 여자를 연기해낼 때는 정말로 감쪽같다. 또 평범한 인물이지만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인 <바람난 가족>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특별해서 영화가 달라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영화가 특별해서 그녀가 달라보이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들은 자유롭고 독창적인척하면서 속으로는 무엇이 좋고 좋지 않은가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가슴중심 사람들(2,3,4유형) 답게, 이들이 가진 삶의 의문은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당신의 시선을 끌고 있는가?’이다. 미적인 측면에서 매혹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예외적이고 비밀스럽고 비정상적이고 이국적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속의 조은숙 교수를 보자.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에게 주위의 많은 남자들이 애를 태운다. 교수, 만화가, PD ... 직업도 다양한 그들. 영화는 그녀의 은밀한 매력이 뭔지는 말하지 못한다. 허술한 내러티브를 배우 문소리씨의 매력으로 메꾸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의 좀 이상한 영화였는데... 영화적 설정이지만 그녀가 얼마나 멋진지 절둑거리며 걷는 것조차 섹시(?)했다.



그녀가 좀 촌스런 복장을 하고 나왔던 영화가 몇 개 있지만,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잠바 떼기 하나만 걸쳐도 상당히 근사하다. <오아시스>의 그 회색빛 잠바와 촌스런 분홍색 곱창 머리끈. 흔히 그들은 ‘나는 방금 급하게 옷을 걸친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옷차림은 대단히 주의 깊게 선택된 것이다. <사랑해 말순씨>에서 눈썹을 싹 밀고, 얼굴에 초승달 모양의 눈썹을 그려 넣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던 장면을 생각해보자. 전혀 촌스럽지 않다. 4유형의 삶이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4유형은 어린 시절에 현실은 견딜 수 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대개 그런 경험은 고통스러운 상실의 체험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4유형의 갈망은 그 잃어버린 것을 향해 있다. 갈망이 소유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자마자 대개 실망한다. 이런식이다.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상대를 견딜 수 없어하고, 결국 상대가 떠나면 그제서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상대가 돌아오면 즉시 사랑이 죽는다. 적절한 예인지 확실치 않지만 <바람난 가족>의 호정이 그렇다. 시종일관 쿨한척하지만 그녀의 삶은 공허하고 그녀의 욕구불만은 해소되지 못한다. 그녀의 문제가 하나씩 해결(?)되고 아기도 가지지만 남편이 돌아왔을 때 ‘아웃이야’라고 소리친다. 이것이 4유형의 방식이다.


4유형은 진부한 것, 시대에 뒤진 것, 평범한 것, 보통인 것, 개성 없는 것, 그리고 모든 ‘정상적인’ 것을 혐오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고급스럽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보통의 정상인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끝부분을 생각해보자. 조은숙 교수는 일어나야할 모든 영화적인 사건이 일어난 뒤에 눈물을 흘린다. ‘야 도대체 저 눈물의 의미는 뭐야?’ 의아해 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우는 것은 누군가 죽어서도, 만화가가 되어 나타난 친구 때문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드러났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는 이 일련의 사태를 생각하며 그 ‘달콤한 슬픔’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4유형의 함정인 ‘우수’이다. 좀 더 극단적인 해석을 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확대해석하면 감독은 영화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이 ‘예술적인 승화’는 4유형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종종 취하는 방어기제이다. 진정한 슬픔의 고통과 거절의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미성숙한 4유형은 ‘나처럼 똑바로 나를 응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때때로 절망해야하는 그들은 진정한 ‘비극적 낭만주의자’이다. 


그들의 근원적인 악은 ‘선망’이다. 누가 자기보다 더 멋있고 품위가 있는지, 또 더 안목이 있고 재주가 비상하고 훨씬 독특한지 안다. 4유형이 선망을 느끼지 않는 대상은 없다. 본인이 갖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선망은 바로 질투로 변한다. 상대가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 한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나는 내가 눈에 안 띄고 버림받지 않도록 강한 인상을 줘야 해’ 때문에 4유형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느낀다. 


평범한 것을 정상적인 모든 것을 피하는 4유형은 다른 사람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변화를 거부하는 그들은 ‘그렇지만 나는 다르고 싶다. 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방식에 맞추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아시스>에서의 뇌성마비 장애인이라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배역은... 그런 특별하고 싶다는 그녀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미성숙한 4유형이 가지는 우울은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정상적인 슬픔과는 다르다. 그들의 독특한 감정과 큰 고통과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에는... 아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핑계 뒤에 슬픔에 대한 거부가 있다. 4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대단히 진지하게 여겨서 마음 깊이 ‘상처’를 받는다. 이런 감정적인 소모 -조증과 울증을 넘나드는- 시련을 통해서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다. 성숙한 4유형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 이것은 본인이 이 모든 것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4유형의 삶의 과제는 건강한 현실성을 발전시키고, 그들의 갈망을 현실성있는 목표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양 극단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자기 에너지를 발견해야 한다. 살면서 겪는 상실의 체험을 직시하고 그 분노를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표를 보면 4유형의 위안점은 1유형이다. 1유형의 가치와 명확성과 양심이 혼돈상태의 자기를 의심하는 주관을 돕는 균형이다. 1유형의 가치는 감정보다 중요하며, 근면이 천재성보다 중요하고, 이성이 상징보다 중요하다. 1유형의 건전함이 4유형이 자신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환상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1유형이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짓밟히지 않고 객관적인 바판을 허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1유형의 타고난 개방성의 도움을 받으면 자신의 자연스러움과 독창성을 접할 수 있다.  (반대로 2유형은 매우 좋지 못하다. 남들의 사랑과 주목을 통해서 자기 본질을 얻기 위해 애쓴다면 상황은 더욱더 악화된다. 미성숙한 2유형의 특징인 친소-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현상-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고, 자기가 의존하는 사람들을 증오하게 될 수 있다)

모든 평범한 것들을 특별하게 해주는 배우 문소리씨 잠시 실례했습니다. 똑같은 영화도 남다르게 보이게하는 당신을 계속 주목하고 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문소리의 필모그래피]


가족의 탄생 (2006) - 미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2005) - 조은숙

사랑해 말순씨 (2005) - 엄마 김말순

사과 (2005) - 현정

효자동 이발사 (2004) - 김민자

바람난 가족 (2003) - 은호정

오아시스 (2002) - 한공주

봄산에 (2002) - 정우

외계의 제19호 계획 (2001) - 처녀귀신

박하사탕 (1999) - 윤순임



PS: 본문의 에니어그램 이론은 [내 안에 접힌 날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7년7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 영화가 날 미치게 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 계속 뇌리에 남기 때문이다.


전체의 기본적인 틀을 이해한 것도 최근의 일로 그것도 번역한 대본 -대사만 나온- 을 읽고 나서이다. 그전에는 특히 동사 황약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랑의 관계 -복사꽃을 통한 -를 잘못 알고 있었다. 너무나 느리고 이야기 진행이 없어서 급기야는 답답함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지만,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 몽롱한 영상에 취해서 의미도 모를 영화를 보고 또 보고 그랬었다.


술 이름이 취생몽사야.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더군. 난 그런 술이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어.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란 말도 하더군.


처음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게 아무래도 중고등학교 때 비디오로 홍콩영화를 볼 때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질과 재미와는 무관하다. 그 영상이 통째로 머릿속을 점령해서 마치 초등학교 졸업앨범이나 어린시절의 가족사진처럼 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내면화된다.



최근에 선리기연이란 주성치 영화를 보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뜬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알고보니 OST가 동사서독에 쓰였던 거였다. 그 음악에 이미 내 몸은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 어린새도 아니련만 홍콩영화는 내 인생에 이미 각인이 되어 버렸다.


강호를 떠도는 건 힘든 일이야. 무공을 알면 많은 일을 못하지. 밭 갈긴 싫지? 산적 짓도 못하고. 약장사는 더욱 하기 싫을 텐데 어떻게 살 거야? 무공 고수도 밥은 먹어야 해.


여왕벌이 하루 종일 알만 낳듯이, 대개의 작가들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며 면벽수도를 한다. 거의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 이외에 글만 쓰면 한 달 정도면 시나리오가 하나 완성되고 조금 완성도를 가진다면 세 달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글 쓰는 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작가라는 호칭이 적당한지 의문이 든다. 제작년에 공모전에 입선이 된 적도 있고 작년에는 몇 군데 영화사랑 일도 해봤지만 역시 데뷔를 안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보면 작가들은 -극장에 영화가 걸린- 서로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른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당연한데도 하여튼 그렇다.


하여튼 작가 비스므리한 존재로 살게 되면서 강호를 떠돌고 사는게 정말 힘들다는 걸 느꼈다. 서독 구양봉의 말과 똑같아 진다. 자신의 재능 없음을 깨닫고서 접으려고 해도 취직하기는 싫지, 아르바이트하면서 생활을 연명하려고 해도 글 쓸 시간이 없어서 그것도 오래 못하지. 밭도 못 갈고 산적 짓도 못하는 인간들의 최후란 두 가지다. 알콜중독이 되던가 다시 사회로 복귀하던가.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동사서독은 볼 때마다 의미가 틀리지만 마지막에 볼 때는 이 말이 참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있었나,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란 존재가 있기는 있었나 의문이 든다. 슬픈 일이지만 내가 행복했다면 절대로 글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거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영화고 시나리오고 뭐고 다 까먹고 정상적으로 살려고 해도 잘안된다. 누가 나에게 취생몽사를 주시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성공하고 싶은 배우 임창정씨에게.


항상 모든지 열심히 하는 임창정씨 안녕하세요. 영화배우란 생각이 잘 들지 않았는데 필모그라피를 보니 영화를 꽤 많이 찍으셨더군요. 가수인가 배우인가 항상 헷갈렸는데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영화속에서 계속 당신을 봤는데도 배우라는 인식이 되어있질 않았네요. 죄송합니다.


3유형은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을 한때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덧없이 지나가며 우연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내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쟁과 과잉생산을 통해 증명할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3유형은 남들에게 믿음을 주는 편안함과 확실성을 발산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고 동기를 부여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습니다. 3유형은 가슴 중심사람들(2,3,4유형)중에 중심 유형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감정을 잘 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2유형들이 ‘당신은 나를 좋아하는 가?’를 묻는 것과는 달리 당신은 ‘나는 출세하고 있는가? 나는 성공하고 있는가?’하고 묻습니다. 


당신들은 흔히 어린 시절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을 받기보다는 성공했거나 남에게 내세울 만한 특별한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칭찬을 받았습니다. “너는 훌륭한 아이다. 우린 네가 자랑스럽다.”이렇게 말이죠. 그래서 점차 성공을 이상화하면서 ‘내가 이겼을 때 나는 훌륭하다’라는 좌우명을 키워왔습니다. 


임창정씨, 당신이 찍은 영화를 쭉 돌아보면 눈물겹습니다. 당신은 영화속에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정말 무지 노력합니다. 때로는 여자의 사랑을 얻어 보겠다고(색즉시공), 혹은 동료가 훔쳐간 조직의 돈을 찾겠다고(시실리 2km), 죽어가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파송송 계란탁), 가난하지만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작은 가게라도 해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비트), 백수지만 사람답게 살겠다고(위대한 유산) 당신은 몸부림을 칩니다. 때로는 시체도 치우고, 칼로 사람을 찌르기도 하고, 똥도 푸고, 국토 종단을 하기도 하고, 염도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차 트렁크에 갇히기도 하고, 정액도 먹고... 정말로 생쇼를 합니다. 


3유형은 정말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사람들은 그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 일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생각하며 성공했다고 받아들입니다. 대부분의 3유형들은 육체적으로도 매력적입니다. 어릴 때부터 잘생긴 아이일 확률이 높습니다.  당신이 제일 처음 찍은 영화라고해서 <남부군>을 봤는데요. 망가지는 캐릭터로 굳혀지기 전이라 그런지 마스크가 나쁘지 않더군요. 하여튼 대부분의 3유형은 낙천주의자에 기운차고 지적이며 정력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으로 비춰진다고 합니다.


슬프지만... 3유형이 주부 노릇만 한다면 그들은 현모양처입니다. 친밀한 관계에서는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낭만이 필요할 때는 또 그렇게 행동합니다. 어떤 집단이든 모범이 되어 그 집단의 기대와 가치를 실현합니다. 그래서 3유형의 남자와 여자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현재의 사회적 규정에 매우 잘 맞습니다. 그러니까 마초적이거나 근육질의 남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 말입니다. 여성에게 조금 더 성의를 보여주려고 애쓰는, 뭔가 부족한 구석이 있는, 약간은 털털하고, 약간은 멍청해 보이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여기서 3유형의 가치라는 것이 반드시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방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임창정씨는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연예인이라는 집단의 가치에 맞도록 적응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보여지는 이미지가 말입니다. 2유형이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을 때 모든 일을 다 하듯이 3유형은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해냅니다. 더군다나 2유형 보다 더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만 당신의 그런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한 장의사>나 <위대한 유산> 같은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당신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백수생활을 즐기며 밥벌이를 강요하는 가족에게 수동적으로 저항을 합니다.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체제에서 중산층이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병환자처럼 취급당하고 열등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보통은 3유형은 그런 비주류의 사람이 되기를 겁내하고 비난합니다. 이 ‘효율성’ 즉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본적으로 가정되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출세할 수 있다’가 근본적인 3유형의 딜레마인 것을 생각하면 위의 두 가지 영화는 좀 의외입니다. 물론 끝내 당신은 장의사가 되고 학원에 나가 강의를 하게 되지만요. 제 생각에는 3유형의 딜레마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자기 일에 몰두함으로 자신을 위협에서 보호하는 3유형의 방어기제는 ‘동일화’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그룹의 비판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실패’는 특히 3유형의 회피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3유형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없는데 임창정씨가 연기한 많은 캐릭터들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실패할 경우 당신은 부분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실패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혹은 또 다른 과제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3유형이 느끼는 성공의 압박감은 그들의 근원적인 악인 ‘거짓’이나 ‘기만’을 불러옵니다. 이기기 위해서 진실을 가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대한 유산>에서 보면 부잣집에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광고지를 보고 바로 김선아씨를 앞세워 그곳을 찾아갑니다. 상황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임창정씨는 마음에도 없는 가식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게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거짓말도 아니고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그 태도가 3유형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는 아내에게 취직해서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는 작은 거짓말을 합니다. 물론 관객들은 당신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이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당신의 약함을 알고 동정하고 때로 웃습니다. 


거짓보다 나쁜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미성숙한 3유형의 거짓말은 스스로 알아내기가 어렵게 변합니다.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자기 자신부터 납득시키기 때문입니다. 자기 확신에 차있는 당신을 우리는 믿어줍니다. 흔히 3유형들은 소문난 중고차 영업사원입니다. 그들이 내놓는 제안들을 좋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결국은 그것이 동네에서 제일 좋은 중고차라고 믿게 됩니다. 왜냐면 그들이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색즉시공>을 보면 당신은 별짓을 다합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당신은 하지원씨에게 미역국을 끓여주고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 보여줍니다. 양파를 눈에 비비기까지 하며 하지원씨를 웃겨주려고 하지요. 제가 당신을 3유형으로 꼽은 것은 이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팔고 있는 당신을 봤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이 선택한 극중 캐릭터들을 보면 전혀 3유형처럼(성공한 사람) 보이지는 않죠 -


미성숙한 3유형이 빠지는 함정은 ‘허영’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근본적인 것을 압도합니다. 자기 몸속에 자신이 있지 않고 마치 그 옆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지켜보며 살아갑니다. 3유형은 타고난 배우들입니다. 몇몇은 최상급 연기자가 된다고 합니다. 3유형의 고통스런 자기 인식이 시작되면 그동안 자기가 저지른 크고 작은 거짓을 거부해야만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3유형에게 적절한 충고는 ‘희망’이라고 합니다. 표면적인 성공 너머에 있는 희망을 통해서 깊이를 얻고 순간적인 실패를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모든 가슴 중심 유형들(2,3,4)은 때때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끊임없는 뭔가를 하고 있는 3유형들의 내면은 자주 파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2유형처럼 3유형도 혼자 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보면 고소영씨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 무지 애씁니다. 그녀는 그런 당신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당신 자체가 좋아서 당신을 택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3형은 사실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만 그것이 당신이 인격적으로 성숙하는 데는 상당한 걸림돌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생애 초반에 발전시킨 날개는 2유형입니다. 기꺼이 남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상냥한 마음씨가 영화속에서 보입니다. 이제 나머지 한 가지 날개를 발전시키면 좋습니다. 4유형의 독특하고 멋져 보이는 날개를 찾으세요. <시실리 2km>에서 그 날개가 나올락 말락 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서민형 인간을 주로 연기하시는데 스타일리쉬하고 근사한 인간도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위의 표를 보면 당신은 6유형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충실함과 신뢰에 문제가 있는 당신이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자기의 역할을 벗고 자신을 상대에게 내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역할 고착을 극복하고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9유형으로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항상 바쁜 당신이 9유형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얼핏 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9유형으로 가면 삶은 공허하고 의미 없어 보입니다.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퇴행된 3유형은 자살 위험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의 임창정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영화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만 가지고 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영화 속에서 온갖 나쁜 일을 저지르더라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당신이 좋습니다. 계속 실패하기만 하는 당신의 무리하고 무모한 도전들도 아름답습니다. 다음에는 좀 편안한(?) 영화를 해야 할 텐데. 너무 무리한 미션들이 안타깝네요. 당신을 보면 배우하는 것도 쉽지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요. 임창정씨 힘내세요!


[임창정의 필모그래피]


1번가의 기적 (2006) - 필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2005) - 김창후

파송송 계란탁 (2004) - 이대규

시실리2km (時失里 2km) (2004) - 양이

낭만자객 (2003) - 갑옷귀신

위대한 유산 (2003) - 창식

색즉시공 (2002) - 장은식

해적 디스코왕 되다 (2002) - 봉팔

자카르타 (2000) - 블루

행복한 장의사 (1999) - 장재현

세리가 돌아왔다 (1999)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8) - 김범수

엑스트라 (1998) 

비트 (1997) - 환규

게임의 법칙 (1994) - 삐끼1

걸어서 하늘까지 (1992) - 정만

섬강에서 하늘까지 (1992) - 구대훈

장미여관 (1990) - 녀석

남부군 (1990) - 전세용


PS: 본문의 에니어그램 이론은 [내 안에 접힌 날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7년4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겨울에 어느 감독을 만났는데 양식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는 후배가 양식장에 와서 쓴 시나리오가 ‘송어’라고 한다. 그 감독과는 서로 대책 안서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몇 번 회의만 하다가 헤어졌다. 하기사 아직 데뷔 못한 작가와 데뷔 못한 감독이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 송어를 본 것은 케이블 TV에서 였는데, 그 감독의 사연을 듣고서 다시 보니 또 달랐다. 영화 속 양식장 주인과는 분명 다른 캐릭터였는데 남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이 영화는 고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겁함과 광기와 폭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보통 전쟁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인간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서 보는 재미라고나 할까. 잘 익은 토마토를 누르면 사방으로 파편이 튀듯이 인간들도 살짝 누르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속을 내보이니 말이다.


일단 얘기의 발단은 소시민인 민수(은행대리)와 병관(갈비집 사장)이 휴가차 초야에 묻힌 친구 창현(양어장 주인)을 찾아가면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시골청년과 사냥꾼 그리고 검정개와 송어들이 이 좁은 골짜기에서 이들의 욕망에 동참한다. 



1. 캐릭터가 가져오는 불안


영화에서 처음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존재는 ‘창현’이다. 극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했는데, 다시 영화를 보다가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한 마디 대사에 웃음이 나왔다.


다름 아닌 아래씬에 나오는 ‘아무 생각도 안해’이다. 



보통 이런 말들을 내뱉는 사람을 ‘흥 깨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사회생활 하기에 조금은 힘든 너무나 정직하고 진지한 사람들 말이다. 조직 내에서 소위 ‘정치’를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힘들어 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26. 창현의 집, 마루                밤


모두 다 대마루에 앉아 창현이 생선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꺼내는 것을 본다.


민수  (저쪽 방을 보며) 저것들 벌써 나간 모양이지?

창현  원래 노루 사냥은 밤에 잘 되거던. 낮에 길목을 봐 뒀다가 밤에 서치라이트로....

병관  맞어, 노루는 밤에 빛을 만나면 꼼짝도 못한다며?


창현이 회를 쳐 상에 올리자 모두들 수저를 들지만 속도가 느리다.


창현  맛이 없니?

병관  그게 아니고.... 낮에 너무 먹었더니.

민수  시골에만 오면 느끼는 건데, 인간은 정말 먹고 자고 싸기 위해 사는 거 같아. 오늘만 봐도 그렇지, 도착해서 한 일이라곤 먹고 잔거 밖에 더 있나?

영숙  그래서 속 편한거 아녜요.

민수  (말없이 먹고 있는 창현에게) 넌 무슨 생각하면서 지내냐?

창현  ....아무 생각도 안해.


규칙적으로 잔을 비우며 밥을 먹고 있는 창현을 바라보던 정화


정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셔요?

민수  내 술 참견도 모잘라 창현이 술 먹는 거까지 챙겨 줄려고?


잠시 주춤하던 정화, 이내 감정을 바꾸며 민수의 팔짱을 낀다.


정화  당신 친구 잖아.

선화  그런데 저 모닥불은 뭐예요?


선화가 가리키는 곳에 모닥불이 보인다.


창현  (픽 웃으며) 태주가 사람들이 오니까 싱숭생승한 모양인데..

선화  싱숭생숭한데 불은 왜 피워요?

창현  (정화를 똑바로 보며) 안 그러면 자기가 거기 있는 줄 아무도 모르잖아요.

정화  ....

병관  우리도 불피워 놓고 한잔 더 하자.


상을 치우기 시작하는 여자들.


그 다음으로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존재는 무식하고 힘만 좋은 것으로 표현되는 엽사 1,2,3 이다. 도시에서 놀러온 두쌍의 부부에게 무차별적인 불쾌감과 굴욕감을 주는 무시하지 못할  이들의 힘은 그들의 짚차와 엽총으로 표현이 된다. 이들의 무례는 정도를 벗어나지만 독특한 면이 보이는 캐릭터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인가? 


#24. 진입로


총을 한 자루씩 들고 뚜껑없는 지프차에 타고 있는 엽사들 세명. 민수와 병관을 데리고 오는 엽사1에게.


엽사2  당신들 사냥하러 온 거요?

민수   (불괘한 표정으로) 주인하고 친구되는 사람입니다만.

엽사1  친구면 친구지 차를 아무렇게나 세우면 어떻게 해?

민수   아니, 말씀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엽사2  빼라면 빼지 말이 많아!

엽사3  젊은 양반들, 이 동네 처음 오셨나 본데 여기는....


병관이 뭐라고 말하려다 엽사들의 기세에 질린 듯 차를 옆으로 뺀 후, 내리는 병관, 이를 듣고는


병관   언제 봤다고 반말하는거요.

엽사1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했나.

병관   뭐? 이 자식?


병관의 멱살을 잡는 엽사1, 이에 병관은 맞붙을려고 한다. 옆에서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민수. 그때 

창현이 내려 오며,


창현   왜들 그러세요?

엽사1  (멱살을 놔주며) 주인 친구라니까 참는다.


병관이 터준 길을 먼지를 일으키며 올라가는 지프차.


민수  아니, 뭐 저따위 놈들이 다 있어?

정화  무슨 일이에요. 여보?

민수  가만 있어봐. 저 사람들 너희 집에 묵는 사람들이냐?

창현  니가 참어라.

병관  무식한 새끼들, 나이가 살려 줬다.


창현에 의해 못이긴 듯이 끌려 가는 민수와 병관.


세 번째 긴장감의 원인은 사냥개를 키우는 시골총각 태주(19세)이다. 민수의 처제 선화에 대해서 성적인 호기심을 보이는 그는 오해로 구타를 당한다. 그가 불안한 이유는 그가 대동하고 다니는 사냥개와 총에 있지 않다. 오히려 청소년들에게서 보이는 심리적인 동요와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무뢰배인 엽사들보다 순진했던 태주가 일방적인 총격전을 벌인 것도 그런 까닭이다.



2. 부적절한 관계가 낳는 불안


조연들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끊임없이 사건을 진행시킬 때, 주연들 또한 각자의 숨겨진 이야기로 나름대로의 극을 이끈다.


우선은 정화(민수의 처)와 창현의 관계가 부적절한 관계로 떠오른다. 정화는 결혼 전날까지도 창현을 찾아가 몸을 섞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그와 함께살지 못했다. 남편을 따라서 창현을 다시 만나지만 여전히 연극이나 했던 그 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현을 동정하기도 하고 술이나 마시며 세월을 보내는 그가 여전히 한심스럽기도 하다.



정화의 사진이 창현의 팜플렛 갈피에서 나왔기 때문에 민수도 이 양어장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한다. 정화는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찾아와서도 전애인 창현에게 소유욕을 보이며 동생을 질투한다. 정화의 이 신경질적인 상태가 시골청년을 두 번이나 오해 받게끔 하게 한다. 결국은 총격전으로 번진 사건의 시작은 정화이다.


두 번째 부적절한 관계는 창현과 선화이다. 선화는 창현이 언니의 전애인인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그에게 호감이 간다. 흔히 어린 처자들이 갖는 호기심과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자신감 때문이다. 선화의 눈빛이 언니의 신경을 긁고 동네 시골청년의 가슴을 긁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엽사2와 영숙(병관의 처)가 잠깐 덫에 걸린 토끼를 매게로 진짜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데 좀 웃기다. 영숙이 엽사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낯선 공간에서 오는 충동일 수도 있고 그저 자기를 여자로 봐주는 강한 남성에 대한 젊은 여자의 호기심일 수도 있다.



3. 이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불안의 실체


하나. 권력관계


영화에서 우습게 된 사람은 세 친구 창현, 민수, 병관이다. 민수와 병관이 별일 아닌 것을 크게 만들게끔 가장 큰 이유는 엽사들의 무례에 있다.


한국사회는 장유유서를 시작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사회적인 제약으로 사람을 상하로 분명하게 가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다. 그게 서로 속이 편하다. 직장이라면 나이보다는 지위가 우선한다. 이것이 가족이라면 나이와 사회적인 지위보다는 정해진 서열이 우선한다. 특히 남녀의 혼인으로 빗어지는 수많은 우스꽝스러운 호칭과 존댓말들을 보라.


민수와 병관이 엽사에게 분노하는 것은 처음보는 사람이 우선 반말부터 지껄이는데서 온다. 손위 사람이라도 해도 ‘젊은 사람들이’라고 시작하는 안하무인 태도는 상하 구분이 뚜렷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과 싸울 수도 없고, 이들은 따져볼 생각도 못한채 그들에게 ‘눈을 내리깔고’ 관계를 시작한다. 이것이 엽사들이 벌인 모든 시비와 행패보다 민수와 병관을 불쾌하게 한다.


극중에서는 친구들끼리의 돈으로 생기는 무의식중의 힘의 우위상태도 나타나고, 부부간의 권력관계도 상세히 보여준다. 부인 앞에서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남편이 참지 못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부분은 가부장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민수와 병관이 그토록 태주에게 화가난 것은, 태주가 선화를 성추행하려했다는 오해보다는 며칠동안 무시당한 자신들의 권위에 있다. 아래씬 태주의 대사에 그 부분이 나와있다.


#77. 양어장


태주, 흙투성이가 된 채 양어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고 그뒤를 민수가 쫓아간다.


태주  아저씨! 아저씨.


삽을 들고 일하던 창현이 놀라 바라본다. 이때 민수가 태주를 잡으려 하자, 얼른 창현 뒤에 숨는 태주. 민수

가 온길 쪽에서 병관이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달려온다.


창현 또 무슨 일이야?

민수 넌 가만있어. 이 자식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


... (중략)...


병관  너 일루 안 건너와!

태주  못 가!

민수  저 새끼 죽을려고.(돌을 집어 던지며) 너같은 놈이 우리처제를 넘봐!

태주  (돌을 피하면서) 에이, 좇 까!


이 말에 안색이 급변한 민수,


민수  저 쌍놈의 새끼


민수  이번에도 물을 건너려다가 옆에 있는 돌만 다시한번 주워 던진다. 태주 날아오는 돌을 잽싸게 잘도 피

해 하나도 맞지 않는다. 창현, 적극적으로 나서서 민수와 병관을 말리며,


창현  그만 가자. 가. 오늘 집에 가야 된다며.


민수와 병관 못이기는 척 창현에게 끌려가며


민수  놔!

병관  에이 시팔 참는다 참어.


병관,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돌 하나 더 던져보지만, 이번에도 피하는  태주. 체념하고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

기는 민수와 병관의 등뒤에다 대고


태주  집에 잘가봐라! 빵구난 차 가지고.


'빵구'라는 말에 민수, 병관 뒤를 돌라본다.


태주  그래, 내가 했다. 이 병신들아.


이 말에 안색이 돌변하는 민수와 병관. 민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을 첨벙첨벙 건너가 다짜고짜 태주를 

후려친다. 병관도 물을 건너가 민수를 거든다. 태주 맞으면서


태주  노루잡는 아저씨들한테는 찍도 못쓰면서 나한테만 지랄이야!


이말에 완전히 팩 도는 병관과 민수. 병관, 태주의 얼굴을 힘껏 후려친다. 비틀거리며 민수쪽으로 가는 태주

를 민수가 잡아서 머리를 물 속에 쳐 넣는다. 민수와 병관 이성을 잃었다. 민수, 태주의 목을 누르면서


민수  어디 물 속에서도 잘난 주둥아리 한번 놀려봐.

병관  어리다고 봐주니까... 이 놈의 새끼, 맛좀봐라.


...(중략)...



둘. 폭력


엽사들은 모욕적인 행동들로 자극 받은 민수와 병관은 태주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태주에게 똑같은 폭력을 당한다. 폭력을 휘두른후 민수와 병관은 마음을 가라앉힌게 아니라 스스로 이미 자기 정당성을 부여하고 태주를 더 나쁜놈으로 몰며 상황을 악화시킨다.


#46.  태주의 집 


고개를 바짝 들고 민수를 노려보는 태주. 

집안의 개들이 모두 미친 듯이 짓어대고 있다. 

병관,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돌아보면서, 


병관   이 자식좀 봐. 한 마디 사과말도 안하고 노려보는 것 좀 보게 ! 

민수   이 놈이.... 어른이 얘기를 하면 알아 들어야지 !. 


이때 들어서는 선화와 정화,

이를 느꼈는지 태주의 뺨을 후려치는 민수. 고개가 돌아갔다  원위치 되는 태주의 얼굴, 민수와 선화를 번갈

아 본다. 


정화   참고 내려가요. 병관씨, 네?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걸 가지고....


어쩔줄 모르고 서 있는 선화. 


민수   아냐, 이 자식 이거 아주 근본부터 못돼먹었어.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병관이 옆에서 태주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병관   눈 내리 깔어, 임마! 안되겠어, 경찰에다 넘겨 버려, 강간미수로.


갑자기 겁먹을 듯한 표정의 태주. 놀라 돌아보는 성희와 눈이 마주친다. 

태주.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고 개 쪽으로 달려간다. 태주. 아키라를 푼다. 

경악하는 민수 일행. 그때. 


창현   태주야, 임마! 무슨 짓이야! 


태주가 창현을 보더니 그대로 멈춰서 서럽게 운다. 중간에 납작 엎드려 태주와 창현을 번갈아 보는 아키라.

창현, 사태를 파악하려는 듯. 사람들을 둘러보다 정화와 눈이 마주친다. 외면하는 정화. 민수의 눈 속에 들어

오는 창현과 정화의 모습. 이를 느낀 듯 


창현   다들 내려가자. 


어색하게 서 있던 민수와 병관이 따라 내려 간다. 계속해서 산 속을 맴도는 개 짖는 소리.


태주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억울하게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선화앞에서 바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95. 양어장


양어장으로 들어온 사람들, 물을 건너 양어장 저쪽편으로 건너려 하고 있다. 창현은 총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이때, 양어장으로 몰려온 개들. 창현이 총을 겨눈다. '탕' 방아쇠를 당기자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간다. 세 마리 정도 꼬구라졌다.


창현  (선화를 보며) 빨리 건너가.


...(중략)...


태주  날 죽이려고 했지? 니네가 사람이야?

선화  (나서며) 잘못했어요. 참아요.


선화를 쳐다보던 태주,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며


태주  나, 김태주. 아버지가 이 나라의 기둥이 되라고 지어 준 이름이야! 이렇게 산  속에 개 키운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왜 나하고는 말도 안하려고 그러는 거야. 똑같이 산에 있어도 저 아저씨한테는 막 대주면서...


창현이 태주에게 달려들어 총을 뱄으려 하자 태주, 방아쇠를 당긴다.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창현. 사람들의 표정이 공포에 질린다. 쓰러지는 창현을 보고 태주 더욱 흥분한다.


태주  (총끝으로 민수와 병관을 가르키며) 니네 둘 무릎 끊고 빌어.


머뭇거리는 병관과 민수. 민수, 주변의 눈치를 사피다 엉거주춤 무릎을 굽힌다. 병관, 민수와 태주를 번갈아 

보고 망설이는데 이를본 태주.


...(중략)...


태주 니들도 한번 맞아야돼. 서루 쳐.


난처한 표정이 되는 병관과 민수, 머뭇거린다. 선화 태주에게 다가가


선화  태주씨, 이제 우리 둘의 문제 아냐!


야간 주춤하는 태주. 총구를 선화에게 겨누며


태주 비켜.

선화  (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못비켜!


태주, 순간 당혹감을 느낀다.


선화  나만 있으면 되잖아.


선화, 태주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태주, 시선을 외면하며 감정이 약간 일어난다. 총구가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사이 두사람 너머 상황을 살피던 네사람. 영숙, 말문을 연다.


영숙 (달래는 투로) 처음엔 총간, 우리한테는 고마운 사람이었잖아.

민수 그래, 사실 처제가 처음부터 잘못보고 오해해서 생긴일아냐.

영숙 그러게 행실을 좀 조신하게 했어야지.


순간  아랫입술을 깨문 선화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저쪽에서 민수, 병관일행 슬그머니 일어나 걸음을 옮기

려 한다. 선화이게서 민수, 병관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태주.


태주  안해!


머뭇거리는 민수와 병관. 태주 다가와 민수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고,  민수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눈다. 민수 

서서히 손을 들어 병관의 머리를 툭 친다. 병관도 받아서 툭 친다. 태주,  여자들에게 몸을 돌려 총구를 정화

와 영숙에게 들어대고


태주  장난으로 하면 죽어!


하며 철커덕 장전을 한다. 점점 광기가 깊어가는  태주. 민수, 병관 서로 얼굴을 보다가 민수  조금 더 세게 

친다. 병관은 인상만 긁고 있다.  태주 개머리판으로 영숙의 머리를 날린다.  푹 꼬구라지는 영숙. 이를 보고 

병관도 민수를 세게 때린다. 민수도 같은 강도로 때린다. 점점세지는 두 사람의 때리기.


태주  계속해 이 병신 새끼들아!


태주, 미친 듯이 웃으며 민수와 병관 앞에 총을 쏜다.


태주  더 세게


...(중략)...


마지막 씬에서 몰염치한 두 부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양어장의 고기들만 자살해서 하얀 배를 하늘로 한다.


확실히 그 불유쾌한 상황이 전쟁터가 아니어서 일상으로의 복귀가 빨랐나 보다. 아무래도 그 양어장에서 한 두명 죽었다면 좀 끝이 달랐을까. 특수한 상황의 권위의 상실과 폭력의 피해를 참을 수 없어하면서도 더 정교하게 그런것들이 남 몰래 일어나는 사회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오는 걸 보니 말이다. 


창현의 송어들은 그 깨끗한 양식장에서도 자살하는 걸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숨막히는 곳에서는 1초도 못 버티고 죽겠지... 끝으로 그 양식장 주인장께서는 부디 오래 버텨주시기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추신: 송어는 ‘스캔들’을 쓴 김대우씨의 시나리오다. 곧 개봉할 ‘음란서생’은 연출까지 한다는데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하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중학교 때쯤 아마 5층짜리 낮은 시영아파트에 살 때인 거 같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니 베란다 유리창이 깨져있었다. . 언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애 둘이 유리를 깼다고 찾아왔더란다. 공 같은 걸 던진 모양이었다. 당사자인 범인은 아주 잘생긴 남자애였는데 장님이었다고 한다. 그 학생이 동생과 와서 사과를 하는데 언니들이 참 불쌍했다고 얘기를 했었다. 미남에다가 눈까지 안보인다니... 그 때는 무엇보다도 나만 그 남자를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본 후 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사뭇 달랐다. 그저 담담했던 대사와 지문의 행간 사이에 저런 화면이 나오다니 ... 좀 놀랐다. 그 신비한 느낌은 단지 이은주라는 배우에게서 묻어 나온 것일까. 


버스 운전기사인 그 남자와 예쁘지만 눈이 안보이는 그녀. 시쳇말로 그림이 된다. 게다가 분위기 까지 사는 것은 이 영화에는 현실과 충돌하는 판타지가 있기 때문이다.


경우(이은주)가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애인이 강의하는 곳을 찾아갈 때부터 영화는 현실을 배반한다. 장님 친구가 없으니 실지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책이나 기타 매체에서 접한 그분들과 그녀 ‘경우’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당당한 그녀는 상담이라는 자기 일도 가지고 있고, 버스가 늦게 오면 기사아저씨에게 호통도 칠 줄도 안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분들은 눈이 예쁘지 않다. 그런데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니는 ‘경우’는 눈까지 이쁘다. 정상인으로 태어났다면 훨씬 맑았을 그분들의 눈이다.


8. 버스 안 - 밤


꽉 막힌 사거리에 서있는 버스 한 대. 

“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

달리는 시내버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스기사, 상현. 대단한 음치지만 내내 흥겨운 표정.


화면 바뀌면, 꽤 헐렁해진 도로를 달리고 있는 버스. 흘러나오는 느끼한 디제이 멘트. 주절주절...

저 멀리, 어두운 거리에 밝게 빛나고 있는, 정류장이 보인다.

정류장에 홀로 서있는 누군가의 실루엣.... 점점 가까워지는 상현의 버스.....

마침내 끼이익..... 버스가 정차하고, 덜컹.... 문이 열리면...드러나는 경우의 모습.


경 우 (문 앞에 다가와) 아저씨. 133번 버스 아닌가요?

상 현 네, 맞습니다.

경 우 (표정변화) 133번 맞아요?

상 현 네.


바둑이를 앞세워 올라타는 경우, 타자마자,


경 우 (버럭)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해요!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요? 

 시골버스도 아니고, 무슨 시내버스가 30분만에 와요!

상 현 (황당한) 차가 막혀서...... 


상현의 말은 듣지 않고 자리로 가는 경우.

룸미러를 통해 경우를 보는 멍한 얼굴의 상현.


경 우 (상현에게) 안가요? 


그제야, 얼른 시선을 거두고 차를 출발시키는 상현. 다시 한번 경우를 본다

여전히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방송


소 리 이어서 계속 노래 듣겠습니다.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조용필의 단발머리 그리고 역시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경우, 앉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더니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룸미러로 흘긋거리는 상현, 문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깜짝 놀라 피하는 상현... 잠시 후, 다시 흘긋거린다

'그대발길이 머무는 곳에...숨결이 느껴지는 곳에...서울의 밤거리를 달리는 상현의 버스

f. o


실제로 영화에서는 133번이 아닌 154번 버스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경우’가 기사아저씨에게 호통치는 이 장면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필시 상현이 한눈에 경우에게 반했으리라.


책, 영화, 만화에서 다루는 로맨스는 사실 여성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돈 많고 멋진 남자와 보잘것 없는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만족을 대신 채워준다. 영화의 어떤 장르보다도 오래된 것이지만 장르적인 관습을 벗어나기 힘들기에 항상 끝이 뻔하다는 온갖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난다면 결말은 두가지다. 사랑을 하거나 헤어지거나. 그래도 우리는 밥맛이 어떤지 알면서도 매일 먹듯이 두 주인공이 어쩌구 저쩌구 할 것 알면서도 묵묵히 그 과정을 지켜보게되는 것이다.



‘품행제로’나 ‘안녕 UFO'는 남자의 시점으로 사랑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뻔할 수 밖에 없는 로맨스를 살짝 비튼다. 여성의 판타지를 대신한다는 목적을 상실하면서 관객수가 적을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지만 약간은 색다른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면에서, 시나리오를 같이 공부하던 한 남학생이 쓴 로맨스를 보면서 던진 한마디가 후회가 되기도 한다. ‘여자들이 이 영화 돈 주고 볼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로 돌아가서 ‘상현’은 뭇여성들의 기대를 저버린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직업도 변변치 않지, 얼굴도 아니지, 남성적이지도 않지... 게다가 착하기까지 하다. 실제로는 정을 주기는 쉬워도 사랑까지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 소위 운명적인 사랑을 하기에는 좀 그런 캐릭터다. 상현이 경우를 좋아한건 그녀가 예뻐서만은 아니리라. 그들의 사랑이 현실에 반하는 두 번째 판타지다.


32. 경우 집 - 낮


분주하게 오가며 이것저것을 치우는 경우.

지나치게 반듯하게-경우만의 식으로- 정돈된 실내를 마치 보이는 듯 자유롭게 오간다.


경 우 미안해. 너 오기로 한 걸 깜박했어. 아직 세수도 안했는데...(히죽.)


입구에 뻘쭘하게 서있는 상현.

어색하지만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 바짝 올려 맨 넥타이... 반듯하게 갈라 넘긴 앞머리...

손에는 가루비누와 화장지, 커다란 수박 한 통이 들려있다.

벌써 상현 앞에 벌렁 드러누워 애교를 부리고 있는 바둑이.


경 우 (환하게 웃으며) 뭐 사왔니?


화면 바뀌면. 테이블에 마주 앉은 상현과 꽁지머리를 질끈 묶은 경우.

피자를 물고 있는 두 사람. 

방안을 둘러보는 상현. 달력 한 장 없는 휑한 벽면.

냉장고에 욕실 타일처럼 반듯하게 붙어있는 사진들을 발견하는 상현.

카메라가 사진들을 훑는다. 유에프오 사진.... 대학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 중 어린 경우가 부모님과 찍은 사진이 눈에 띈다. 외국의 어느 곳인 듯한 배경.

상현에게 와서 피자를 달라고 꼬리치는 바둑이.

경 우 이거 다 먹으면 니가 치워야 된다. 안그러면 개미생겨.


...(중략)...


상 현 (꼴깍... 타이가 답답한 듯 끌어내린다)


잠깐 어두워지는 경우. 그러다 문득,


경 우 ...... 아.

상 현 ......?

경 우 잘됐다. 너 온 김에 목욕하자.

상 현 ?


화면 바뀌면. 욕조에서 발버둥질 치고 있는 바둑이.

팔다리를 돌돌 걷어올린 상현, 물범벅이 돼서 바둑이를 씻기고 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욕조에 매달리는 바둑이. 이내 비눗물을 사방에 턴다.

비누 범벅이 되는 상현, 얼굴에 묻은 비눗물을 닦는 사이. 상현에게 찰싹 안기는 바둑이.


화면 바뀌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상현.

좀 떨어진 곳에 경우도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 음악소리도 없이 조용한 실내.

경우, 갑자기 상현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경우의 갑작스런 행동에 흠칫하는 상현. 

눈을 감고 상현의 머리 냄새를 맡는 경우.

유혹할 의도는 전혀 없는데 그래서 꽤 유혹적인 경우의 작은 표정 변화들...

그 얼굴을 보다가 말다가 보다가 마는 상현.

그 동안 실내가 너무 조용해졌다.... 침묵을 깨는,


...(중략)...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핸디형 녹음기를 찾아내는 경우, 테입을 맨 앞으로 돌린다.


상 현 뭐야?

경 우 녹음기... 나한테는 사진기...

상 현 (녹음기와 경우를 번갈아 보는)

경 우 (버튼을 누르고) 동네 친구 박평구군과 함께하는 첫번째 일요일입니다


상현, 경우를 한 번 보고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녹음기를 상현쪽으로 들고 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

상현, ‘꿈은.....’ 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따라 웃는 경우. 나란히 앉아서 깔깔대며 웃어제끼는 두 사람.

웃다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깊게 숨을 마시는 상현.

경우도 웃다보니 갑자기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가만히 상현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찾고... 입술을 찾고...

그대로 경우를 보는 상현... 가만히 다가가 입을 맞추는 경우....

상현, 뒤로 주춤하다가 같이 다가든다.... 야곰야곰야곰..... 

공허하게 눈을 뜨고있는 경우... 손가락으로 상현의 눈을 가만히 닫는다.

눈을 감은 상현.... 잠시... 살며시 떨어지는 경우... 눈을 뜨는 상현...


경 우 우리... 이래도 되나? 만난지 5일밖에 안됐구...

    아직 서로... 잘 모르구... 그리구...(잠시)... 넌 내가 아무렇지도 않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경우. 

상현... 무슨 말을 해야할지...


경 우 평구야...

상 현 ......

경 우 (얼굴을 감싸쥐며) 으... 쪽팔려라...

상 현 .........

경 우 (피식 웃고) 나 왜 이러지? 너한테 자꾸 실수만 하고...

상 현 .........

경 우 ..... 우리 이렇게 더 있다간 진짜 복잡해지겠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경우. 가는 경우를 보다가...

상현, 그때까지 참았던 숨을 내뱉듯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이사오면서부터 복덕방 할아버지에게 UFO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UFO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그녀의 말에 할아버지는 이쁜 할망구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보이기도 한다. 유도복이며 번개전자 사장이며 복덕방 할아버지며 모두 그녀의 말에 관심을 귀울여 준다. 그녀가 벌이는 깜찍한 UFO 소동에 동네 주민들이 휩쓸리게 되는 것이 세 번째 판타지이다.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위에서 말한 현실에 반하는 것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한 관객의 바람이기도 하고 세상을 따뜻하게 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 수많은 작은 배려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주인공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는 끝내 ‘그녀는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95. 경우의 집 - 새벽


온통 젖어있는 경우의 방. 장판 위로 찰랑찰랑 남아있는 물.

침대에 쓰러지듯 이불을 내려놓는 상현.

거친 호흡. 땀으로 범벅인 얼굴. 힘겹게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보면, 변기 위. 그 자세 그대로 꼼짝 않고 앉은.... 경우.

한동안 보는 상현의 눈빛. 


상 현 ........ 여관으로 가는 게 안 좋겠어.....? 

경 우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상 현 경우야.....

경 우 ...........


아무 반응 없는 경우. 꼭 다문 입술.

상현의 시선에 경우가 꼭 붙들고 있는 핸드폰이 들어온다.

깜빡이는 핸드폰 램프. 그걸 보는 순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현.


상 현 너... 지금 이게 말이 되니?

경 우 ......

상 현 ... 나는... 걱정돼서 잠도 못자고 왔는데...

    이렇게 있을 거면서 너..... 도와달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니?

    너.. 그 사람 다시 만났잖아... 나는 정말... 너... 모르겠어... 

    물 무섭다면서... 싫다면서... 이게 말이 되냐구?!

경 우 .......

상 현 뭐라고 말을 좀 해... 정말 ... 답답하게 그러지 말구! 

경 우 ... 니가 뭘 알어? 니가 날 알어?

상 현 지금 그런 게 중요하니? 중요한건....(멈추는)


경우가 울고 있다.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경우를 보는 상현.


경 우 난 이게 중요해!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난 이게 중요하다구... 말을 하라구? 뭘 말하라구?

    너한테 전화 안했다고 이러는 거니?

상 현 ......

경 우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뭘 말할까?... 난 그냥 이런데...

상 현 ......

경 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전화 했었어... 

    너한테 안한것 뿐이야... 


두 사람 사이. 건널 수 없는 침묵.....

상현의 입가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한숨.

상현, 경우를 보지만..... 고개를 돌린 경우.

상현..... 천천히 돌아선다.

경우의 집을..... 나간다.

꼿꼿한 경우의 얼굴에 굵은 눈물이 떨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부분에 중요한 대사가 더 나온다. 


상현  나한테 전화 안한게 정말 화가나. 난 정말 너 모르겠어.

    도대체 네 마음이 뭐니, 난 뭐냐. 난 뭐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니.

    어떻게 한번도 솔직하지를 않니.


경우  넌 나한테 솔직했어?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뭘 바라는데.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뭘 도와주겠다는 거야. 언제까지 도와주겠다는 거야.

     넌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건데...


영화에서는 ‘경우’가 UFO를 바라는 것은 어린시절의 경험처럼 한 번 더 눈을 떠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경우에게 UFO가 바랄 수 없는 희망이나 보이지 않는 지표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경우’의 UFO는 그냥... 상현의 전인권 반지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취미 같은 거 말이다. 


철지난 'Be the Reds!'를 입은 사람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며 2002년 월드컵 때보다 후의 영화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묘하게도 영화는 더 이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비현실적인 많은 부분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영화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대 초의 우리의 모습을 왜곡하지 않고 잘 그려내고 있다. 동시대를 산 같은 또래만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것들. 


가끔씩 외국영화를 보며 ‘쟤네 왜 저래’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 있었는데... 필시 외국인들이 보면 이해 못할 몇 가지 장면들이 있으리라 지레 짐작하면 기분이 좋다.


마지막으로 요즘에 푹빠져서 보는 ‘그여자’란 드라마에서 언급된 시를 읊으며 상현의 가슴속에 들어왔던 ‘경우’를 추억해 본다.




“나의 꽃 ... 한상경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서가 아니다. .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 속에 이미 피어 있기 때문이다.”




PS : 

고은님이 ‘번지점프를 하다’로 한방에 스타가 되었다면 인터넷 사이트로 스타가 된 분이 있다. 이해준과 이해영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이들의 ‘품행제로’트리트먼트는 작가지망생들이라면 모두 보았을 듯싶다. 가끔 들리는 곳인데 영화만큼이나 신선하다. 

대부분 시나리오 작가들의 필로그라피가 우왕좌왕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그런대로 자기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어 반갑다.


각본: 김지혜, 이해준, 이해영 / 감독:  김진민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