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는 길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와본것 같은 느낌이 드는가 하면 매일 다니던 길인데도 낯설게 보이기도 한다. 영화로 치면 나는 후자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차우>또한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봤다. 감독의 전작이 <시실리 2km>라서이다.

시실리... 그때까지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선보이지 않았던 혼합장르가 주는 막나가는 분위기를 잘살린 작품으로 기억한다. 호러와 코믹의 장르를 섞으면서 분위기는 블랙코미디정도? <차우> 또한 혼합장르의 성격을 띤다. 국내에서 제작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그 ‘어드벤처’와 액션과 코믹의 믹스매치가 꽤 신선하다. 그래서 이름 한 번 지어봤다. 스파게티 서부극처럼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아 시실리, 삼매리, 등등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뻘짓 좀 많이 하시라고.


#한국적 스파게티의 장르로 부른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재 소재가 다르다. 식인 돼지가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 소재자체가 아주 독창적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와 다른점이 있다. 영화에는 생략된 씬 하나를 보자.


S#41. 삼매리, 목장 풍력 발전소

능선에는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고,
고구마를 들고 서 있는 동네꼬마 덕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갈대밭이 요동치며 ‘크르르..’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덕구의 앞에서 멈춘다. 수풀 사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초록빛 눈.

덕구        와.. 너 진짜 많이 커졌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해.
           
다가서며 수풀 사이로 고구마를 내미는 덕구.

덕구        자, 먹어 얼른.. 네가 좋아하는 밤고구마 야.

멧돼지의 주둥이에 고구마를 들이미는 덕구.
하지만, 냄새를 맡곤 주둥이를 돌리는 멧돼지.

덕구
        왜, 이제 고구마 싫어? 좋아했었잖아..
...(중략)...


그렇다. 영화에서는 식인돼지에게 인성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를 보면 초록빛 눈의 식인돼지가 처음부터 사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산속에 식량이 없어지자 시체를 파먹기 시작하다가 내장맛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초록빛눈은 자기 짝인 암컷 멧돼지로 바비큐 파티를 여는 마을 사람에게 적의를 품고, 새끼 멧돼지에게 강한 부성을 보인다. 이쯤이면 사람이다 싶다.



둘째 장소가 다르다. 어딘가 있을 법한 그야말로 촌구석. 비리도 눈감아 줘야할 것 같은 끈끈한 공동체. 삼매리는 시끌벅적하고 정신산만하지만 그런대로 괜찮다. 오히려 영화후반부가 어드벤처가 되면서 산속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매끈해지는 대신에 조금 식상해진다. 마지막에 공장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극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대신에 신선한 맛이 싹....사라진다. 처음에 좀 후져보이는 그 마을회관이랑 파출소랑... 김순경네 집이랑 주말농장을 잘 이용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좀 든다.

셋째 사람이 다르다. 얘기가 위의 것과 좀 겹치는데 캐릭터 디테일이 괜찮다. 게으른 파출소 소장, 오지랖 넓은 동네이장, 비리의 온상처럼 보이는 곽사장, 있을 법하나 행색이 이상한 미친년 등등. 처음에는 스토리와 상관없는 미친년의 등장에 약간 짜증이 났으나 영화곳곳에 등장하는게 재미가 꽤 쏠쏠하다. 특히 김순경 뒤에서 따라올때는 정말로 웃겼다.

상당수 관객들이 이것저것 막 비벼놓은 것을 불편해 하는데도 용감하게 이렇게 영화를 찍은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다음 작품에 기대를 걸며 인상적인 씬중 하나를 읽고 책을 덮겠다.


 

S#58. 삼매리, 마을회관 안(밤)
...(중략)...
다시 한 번 ‘쿠웅~!’ 소리와 함께 강하게 회관 벽에 부딪치는 무언가.
충격으로 깜박깜박 하던 천정의 백열등이 꺼지고, 암흑이 되는 실내.
그제야 노래를 멈추는 수련. 웅성거리는 사람들..

수련       뭐야?.. 정전이야?

사냥개들을 진정 시키고, 슬며시 엽총으로 손을 가져가는 백포수.

한 순간 흐르는 정적..
백포수 엽총을 집어 드는 순간,
‘콰앙!!!’ 회관 벽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드는 검은 물체.
검은 물체에 들이 받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나동그라 지는 선배.

수련        선배!!!

검은 물체,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하고, 아수라 장이 되는 회관.
날뛰는 검은 물체에 조준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백포수. 스쳐 지나가는 탄환.
검은 물체, 동작을 멈추고 백포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시무시한 짐승의 실루엣이 백포수의 시야에 들어온다.
지옥불 처럼 타 오르는 안광..
어마어마한 모습의 야수를 멍 하니 바라보고 있는 백포수.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백포수 쪽으로 걸어오는 멧돼지.

멧돼지, 백포수를 지나쳐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다.
테이블 위, 새까맣게 탄 암컷을 입에 물고 회관 밖으로 끌고 나가는 멧돼지.
넋이 나간 듯, 암컷을 끌고 가는 멧돼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포수.
...(중략)...

 

 

** 이글은 제가 네이버카페 월간시나리오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9년1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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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홍보대행사에서 일하고 있는 언니가 작년에 개봉한 영화중에서 규모에 비해서 ‘애인’이 성공적인 홍보 사례로 뽑히고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돈을 들이면 광고, 공짜로 기사가 나가면 홍보라는데 이슈거리를 잘 잡아서 언론에는 많이 나갔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매체가 협조적이었으나 역시 흥행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용면에서 좀 아쉬운 작품이지만 연말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것이 가여워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


! 영화가 하나의 문장이라면

영화에 나오는 소품과 배우가 내뱉는 말들은 앞뒤 댓구가 맞기마련이다.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대사들도 나중에는 이유가 있다. 이것은 아무리 허접한 영화라도 딱딱 맞는다. ‘애인’은 영화에 뜬금없는 대사와 행동이 많이 있어서 저 씬은 왜 들어내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이 눈에 띄였는데 시나리오를 보니 원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게 영화 하나도 하나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장의 호응’이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것이 한쪽만 들어가면 참 이상하게 짝이 없다. 왜 한쪽만 들어냈을까?


#57. 가라오케

... (중략) ...
남자, 무릎을 꿇으며 여자의 스커트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짧은 신음소리를 내는 여자. 그녀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여자의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 반주 음악과 섞여 묘한 리듬감을 만든다.
이제 반주 음악도 끝나고 여자의 신음소리만 들린다.
여자, 한 손으로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고 1번을 누른다.
플립 창에는 ‘내 사랑’ 이라는 문자와 전화번호가 뜬다.
여자의 핸드폰에 매달린 작은 매듭이 출렁거리고 있다.

여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연하게) ... 어디야..? 나..? (입술을 깨물며) 궁금해..?
    (남자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로 조르며) ...왜 갔어?...

여자, 핸드폰의 송화구를 손가락으로 막으며 숨이 끊어 질 것 같은 신음 소리를 한번 내고
    다시 전화 받는다.

여자    ...아까 왜 갔니?... 나랑 섹스 할 때 좋아? 나랑 섹스 하는 게 재밌니?
    난 재미없어...! ...다, 재미없어...!!

하며 여자 핸드폰 파워를 꺼버린다.
여자, 몸을 일으키는데 남자 화난 표정으로 여자의 몸에서 떨어져 바로 앉는다.
남자의 얼굴은 기묘하게 굳어있다.
여자, 뜨악한 심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가다듬는다.
일순간 방안 가득 냉랭한 기운에 감싸인다.

남자    ...지금까지 나랑 하면서 그 놈 생각했던 거야? ...남편이야?
여자    ...
남자    아님 애인...?
여자    ...좋을 대로 생각해...
남자    ...왜, 그 자식은 이렇게 안 해주니?
여자    (실소) ... 너도 별수 없구나... 너 지금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아니?

여자, 갑자기 가방과 옷을 챙기고 일어서 경멸의 눈동자로 남자를 쏘아보며..

... (중략) ...


위 씬은 아래 씬과 호응을 이루게끔 처음에 설계가 된 것이다. 아래씬은 영화에서는 삭제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위씬에서 ‘너 지금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아니?’란 대사를 지웠어야 한다.
댓구를 이룰 때는 처음에 나오는 행동은 다음에 나오는 것을 위한 장치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쪽만 남은 행동은 목적을 잃고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이 영화에서는 댓구가 되는 대사나 행동들이 몇 번이나 짝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하게 화면만 채우게 되는데 그 점이 좀 아쉽다.


#59. 가라오케 앞

힘없이 돌아오는 남자. 가라오케 앞 조그만 화단 앞에 앉는다.
남자,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을 본다. 착잡하다.
잠시 후 여자가 가라오케에서 나온다. 그녀의 팔엔 남자의 가방이 들려져 있다.
여자,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    ...꼴이 그게 뭐야...?

여자, 걸어와 남자 곁에 다가가 앉는다.

남자    ...왜 왔어...?
여자    내가 내기로 했잖아... 당신 돈 하나도 없잖아...
남자    ...
여자    ...나 안보고 싶었어?
남자    ...
여자    보고 싶었지?
남자    ...지금 오바하고 있다는 거 아니?

남자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가만히 기댄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앉아있다.



? 남자와 여자

작가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시나리오 자체는 소설식 지문에 낡은 느낌의 대사가 오고간다. 아마도 주위에서 진부하다는 평을 개인적으로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2005년 현재로 좀 더 세련되어 지고 좀 더 현실적으로 바뀌어 다행이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처음에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은 주인공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이름이 없다. 단지 남자 여자로 받아들여진다.

#11. 북 카페 앞

    붙어있는 고은의 시.
    이곳에서 나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나는 당신의 당신입니다. 두 사람의 숲. 헤이리.
    여자와 남자, 그 시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여자    여기... 왠지 마음에 들어요.

    여자, 고개 들어 연못 위에 자리 잡은 나무 한그루를 바라본다.
    고인 물의 파문을 바라보다 문득 묻는 남자.

남자    이름이 뭐예요?
여자    여자요...
남자    예쁘네.
여자    그쪽은요?
남자    남자요.
여자    유치해.

    남자, 웃는다. 여자도 쫓아 웃는다. 


둘이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은 엘리베이터지만, 서로에게 눈길이 간 곳은 거의 반나절을 함께 보낸 파주의 예술가 마을 ‘헤이리’이다. 거기라면 그런 일이 일어난데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딘가 낯설고 휑한 고급스런 공간 말이다. 붕 뜬 것 같은 그 비현실에서 히끄므레하고 젠틀한 멋진 남자를 보게 된다면 어느 여자라도 한번쯤 흔들리지 않을까.

이성으로 강하게 느껴서 원나잇 스탠드를 하게되었겠지만, 아래씬처럼 둘은 그저 서로 ‘놀’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10. 갤러리 내 옹기 전시장

    옹기들이 전시된 곳으로 나오는 여자.
    좁은 복도를 따라 갖가지 옹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여자, 옹기들을 둘러보며 슬쩍 주위를 살펴본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찾고 있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 계단을 올라가 야외카페가 있는 곳으로 나가본다.
    그곳에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의 얼굴에 약간의 낙망한 표정이 스친다.
    그런 여자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잡힌다.
    남자, 이층 전시장 한 곳에서 여자를 지켜보고 있다.
    여자, 천천히 전시장안으로 들어와 진열된 자기들을 보기 시작한다.
    남자, 소리 없이 여자의 옆으로 다가가 선다.

남자    나 찾았어요?

    흠칫 놀란 여자, 순간 옆을 돌아보다가 남자와 몸을 부딪힌다.
    숄더백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남자, 허리를 굽혀 떨어진 백을 주워들고 웃는다.

남자    왜 날 찾으러 다녔죠?
여자    (당황스런 얼굴로 백을 받아든다) ...누가요?
남자    (여자를 빤히 보며) 찾았잖아요. 조금 전에. ...아니예요?
여자    (눈길 피하지 않고) 당신이 날 따라왔었잖아요.

    남자,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는다.
... (중략) ...

남자    뭐 말 안해도 좋아요. 지금부터 뭐할 거죠?
여자    그건 왜요?
남자    놀아요, 우리.
여자    (멈춰 서서 남자를 돌아본다) ...내가 왜 당신이랑 놀아야 되죠?
남자    누구랑 뭘 하고 놀아야 하지? 하는 얼굴이예요, 지금.
    내가 놀아준다니 고맙지 않아요?

    여자, 황당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자    ...항상 그렇게 자신만만해요?
남자    나 약한 남자예요. 거절당하면 울지도 몰라요.

    여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할지 모를 얼굴로 남자의 얼굴을 본다.
    내심 망설이고 있다.

남자    ...이렇게 생각해 보죠... 우리.
    당신은 이곳에 처음 왔어요... 낯선 길이죠... 조금은 두려울지도 몰라요.
    난 이곳에 마지막으로 왔죠... 내일 이곳을 떠나니까요...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예요.
    이곳에서 당신과 내가 만났어요. 여기 마지막으로 온 나와 여기 처음인 당신...
    하루의 인연치곤 꽤 괜찮은 인연이지 않나요?
    근사한 여행의 길친구를 만나는 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천구백팔십사만배쯤 행복한 일이죠.

    여자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내 감춘다.

... (중략) ...


남자건 여자건 상대방이 마음에 들 때는 분명히 외모 중에 한군데 이상이 좋아 보인다. 그것이 넓대대한 등짝이든 귀여운 코끝이든 못생긴 둘째 발가락이든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작업 거는 남자의 그럴듯한 변명으로 그녀의 발목이 나온다. 평범하면서도 살짝 웃음이 나온다. 이래서 손목하고 발목이 가는 여자가 한 없이 부럽더라...




#33. 숲속

    한적한 숲길로 접어드는 둘..
... (중략) ...

여자    저기 좀 앉자.. 발이 아퍼.

    여자, 풀밭에 앉아 발을 꼭 죄고 있는 높은 샌들을 푼다.
    남자, 여자의 발로 손을 뻗는다.

남자    어디 봐.
여자    만지지마.
남자    ...괜찮아.

    남자, 여자의 발을 잡더니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한다.
    여자, 역시 조금 쑥스러운 듯 발을 뺀다.

여자    그만해... 괜찮아.
남자    (놓지 않고)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왜 술 마시자고 했는지 물었었지?
    당신 발목 때문이야. 잡아보고 싶었어.
여자    (웃는) 웃긴다.

    남자, 웃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여자의 발목을 손으로 동그랗게 잡아본다.
    여자, 웃음을 그치고 그런 남자를 가만히 본다.
    순간 장난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보는 남자.

남자    근데 당신 그 말, 진짜야?
여자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자, 흘겨보며 발목을 뺀다.
    남자, 웃으며 다시 잡는다. 여자 다시 발목을 빼려한다.
    놓지 않는 남자. 그대로 그녀 위로 올라가 그녀를 덮쳐버린다.
    깔깔거리며 웃다가 서로를 마주보는 남자와 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렬히 키스한다.
    여자, 입술을 떼고 열에 들뜬 얼굴로 남자를 바라본다.

여자    정말 미치겠다... 나 오늘 왜 이러니...
    머리는 이러면 안돼 하는데..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입이 저절로 움직여..
    정신을 차려보면 몸이 막 움직이고 있고.. 입이 아무거나 말하고 있어..
    당신... 누구야?
남자    (물끄러미 보다가) ...당신은 누군데?

    여자, 피식 웃는다.
... (중략) ...


그들은 왜 서로에게 이끌리는가. 영화는 그것이 여자이고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 무엇이 더 필요하랴?


, 욕망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여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논해보려고 한다. 참 원론적인 이야기고 또 말하기 촌스런 주제이지만 그래도 말해야겠다.

‘애인’의 주인공은 ‘여자’이다. 그녀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이끌려 하루를 보내면서 섹스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얘기도 한다. 그녀는 조금 있으면 결혼을 할 예정이고 차림새와 말 본새를 보면 중상층의 보통여자다. 직장은 다니지 않는 것 같지만 매듭공예를 취미나 혹은 업으로 할 정도로 자기 일은 있고, 아무 때나 어느 남자라도 좋다는 여자는 아니다.

영화에서는 키가 크고 미인인 여배우가 나와서 ‘심심해서 죽겠으니 나랑 좀 하자’는 식으로 그림이 나오고 있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가 된다. 게다가 화면은 그녀의 몸을 관찰하고 있다.

카메라가 그 대상을 비추고 있다고 손 치더라도 적어도 시나리오는 그 여자의 ‘몸’을 흝어내리고 있으면 안된다고 본다. 쾌락의 대상인 그녀가 아닌, 쾌락을 느끼는 혹은 느끼고 싶어하는 그녀를 그려야 한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는 아름답게 느끼는 그녀의 발목을 비출게 아니라 그 남자의 넓은 가슴과 따뜻하고 커다란 손을 응시했어야 한다. 그녀가 삶의 권태이든 외로움이든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는 그 열망이 시나리오 어디에도 없다.


#3. 엘리베이터 앞

    걸어온 여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른다.
    그때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위에 덮여진다.
    흠칫 놀라 손가락을 빼고 서로 멋쩍은 목례를 나누는 여자와 남자.
    여자와 남자,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들이 있는 곳은 29층이다. 엘리베이터는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남자, 여행 팜플릿을 뒤적이다가 흘끗 여자를 본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희고 단아한 이마.. 오만한 듯 꼭 다물린 산호빛 입술.. 가늘고 흰 목선과 끝까지     단추를 잠근 하얀 블라우스.. 봉긋한 가슴.. 타이트한 치마선을 따라 드러나는 부드러운 힙.. 희고 매    끈한 종아리를 지나.. 가느다란 하얀 발목에 멈춘다.

    여자, 무표정하게 서 있는 듯 하지만 남자를 의식한다. 
    두 개쯤 단추가 풀린 흰 셔츠에 편안한 면바지.. 맨발에 갈색 가죽샌들..
    근육이 적당히 솟은 팔뚝..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 손에 든 여행 팜플릿..
    남자가 든 여행 팜플릿엔 파란 하늘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 팜플릿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여자의 시선.. 
    남자의 시선이 흘끗 여자의 시선을 향한다.

    여자,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다.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옅은 한숨을 내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바깥 전망이 보이는 엘리베이터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
    여자, 잰걸음으로 먼저 타고 지하3층을 누른다. 남자도 천천히 따라 탄다.


처음으로 영화를 찍는 것은 작가의 머릿속이다. 필름만 넣지 않았지 누구라도 자신만의 영화를 찍는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시나리오를 받아든 투자자들도 배우들도 자신만의 영화를 머리로 찍는다.

욕망의 대상으로만 비춰진다는 것. 특히 카메라가 그런 관습을 깨뜨리는 것은 쉽지 않다. 완성물의 시선이 바뀌더라도 처음 시나리오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작가의 머릿속을 탓할 밖에...

반대로 카메라는 정말로 여자만 좋아하는 ‘남성성’을 가지는가? 그렇다면 왜 로맨스나 멜로 영화의 카메라는 여성의 몸을 비추지 않고 멋진 남성을 바라보는가.    

결과물을 보면 만드는 사람들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영화 ‘애인’은 ‘남성’관객을 겨냥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85. 해장국집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감자탕 냄비를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남자, 여자의 앞으로 수저를 꺼내 놓는다.
여자는 벽에 기대앉아 멍하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 여자에게 물을 따라주려 물병을 드는데 물이 차다.

남자    여기, 따뜻한 물 한잔만 주세요... (하며 자기 잔엔 찬물을 따른다.)

... (중략) ...

여자    당신하곤 친구 안해.
남자    왜?

여자, 먹던 수저를 놓는다. 그리고 남자를 빤히 본다.

여자    당신... 그런 여자 있어?
    너무 좋아서...미치게 좋아서...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
남자    ...
여자    나... 좋은 남자에 대한 추억 하나쯤 갖고 싶어...
    너무 좋아서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남자 말이야.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죽을 때도...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는... 그런 남자...

남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여자    당신도 좋은 여자, 추억 하나 쯤은 갖고 싶지 않아?...
    난 당신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자    (여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당신 정말 나쁜 여자다...
여자    ...어... 나 나쁜 년이야...

여자, 눈물이 나려하자 얼른 시선을 내리고 다시 감자탕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수저를 멈춘 채...

여자    당신 아까 나한테 실수했다...?
남자    ...?
여자    따뜻한 물만 안 챙겨 줬어도... 다시 만나자고 했을때 그러자고 했을지도 몰라...
남자    ...
여자    (혼잣말처럼) ...정말이지... 쿨 해지기 힘들다...

여자, 그리곤 다시 감자탕을 먹기 시작한다.

여자    이 집 감자탕 정말 맛있네... 그렇지 않아요?

남자, 여자의 갑작스런 높임말에 뜨악한 심정이 되어 여자를 바라본다. <music in>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감자탕만 열심히 먹는다.
카메라, 밖에서 감자탕 집을 비춘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 말없이 감자탕만 먹고 있다.


영화는 멜로영화를 표방하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줄거리와 내용에 불구하고 마치 성인 남성을 위한 ‘에로물’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내 남자 모르게 하나쯤 갖고 싶은 愛人”이라는 영화의 한줄 카피가 참 아쉽다.


감독: 김태은/ 각본: 윤창훈 / 각색: 김민주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3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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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연쇄살인

지지난 토요일에 “한국 살인사건의 유형분석”이란 주제로 황순일(경찰종합학교 수사학과) 교수님의 강의가 있어서 소재나 건져볼까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네오이마주 필진모임을 배신하고 충무로로 발길을 향했다.

우선 고대봉사건(1963년)이나 우범곤(1982년) 사건은 대표적인 연속살인 사건으로 피해자만 각각 6명과 56명이나 되었다. 이들 사건은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 지고 나름대로 살인 동기가 있었던 사건이다.

연쇄살인은 년대별로 대표적인 것을 사건일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김대두사건(1970년대), 김선자사건(1980년대), 경기남부연쇄살인사건(일명 화성연쇄살인. 86년부터 10년간), 지존파사건(1990년대) 은 연쇄살인에 속하는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뚜렷한 동기가 없이 가차 없이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연쇄살인이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2건이상(미국은 3건으로 잡는다고 한다)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개개의 사건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차(심리적 냉각기)가 있고 범죄수법은 늘 유사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범인은 가능한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일부러 특별한 것을 남기기도 한다고 한다. 피해자와 안면이 없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한다.

수법이 제일 끔찍한 것은 김대두사건이었는데 거의 엽기호러영화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임산부와 노약자를 위해서 방법은 설명하지 않겠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어이 없이 죽은 것은 우범곤사건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탄을 가진 경찰이 이유 없이 비무장상태의 마을 사람을 해쳤기 때문이다.



2. ‘혈의 누’는 과연 연쇄살인인가

영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연쇄살인의 형태를 취하는데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첫 번째, 살인자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사건을 벌인게 아니기 때문이다. 죽어간 사람은 과거의 특정한 일에 연관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미 목표를 정하고 시작했다.

두 번째, 개별 사건이 띄엄띄엄 일어난 것은, 적절한 기회를 봐서 계속 사람을 죽인 것이지 범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심리적 냉각기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세 번째,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개별사건의 시간을 좀 더 단축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선은 이러한 세가지 이유로 난 이 영화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쇄살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3. <혈의 누> 사건일지


- 1808년, 섬 동화도
- 나흘간 효시, 육장, 도모지, 석형에 의해 4명 살해. 살인 미수 1건(거열)
- 방화 조사로 원규, 최차사, 장 호방 등 외부 수사 인원 투입하여 조사 중
  연쇄살인 발생. 수사 5일째 범인 생포에 실패. 본 사건관련자 2명 사망. 1명 자살.

- 독극물 검사로 용의자를 검거했으나 연이어 살인사건 발생
- 첫 번째 용의자의 죽음으로 강객주 사건을 조사하게 됨.
- 두 번째 용의자 추적중 범인의 단서를 잡고 마지막 범행지를 알아냄
- 범인은 검거중 사살당하고 두 번째 용의자는 마을사람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함


4. 시나리오의 아쉬움

사극과 스릴러의 조합. 전혀 안 어울리면서도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지는 두 장르.

먼저 사극이란 장르적 측면에서 조사도 많이하고 군데군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다섯 가지 형벌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신선한 감이 있었고,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생각했던 진상품인 한지가 공장식으로 경영되었던 것이 놀랍기도 하고 흥미가 있었다.

볼거리란 측면에서 혹은 소재적인 측면에서 사극이란 장점은 잘 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후자 스릴러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아쉬운 면이 많이 있다. 스릴러의 주요 재미인, 범인을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쉽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섬에서 일어났던 ‘강객주 일가 몰살’에 관해서도 사람의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는 것부터다 문제다. 이 영화가 사극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허술하게 느껴졌을 것인가. 영상은 흠잡을 데 없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으나 역시 이야기 전개방식에 문제가 있다.


 1.프롤로그

밝은 달이 보인다.
이윽고 엷은 바람이 찰랑이면 하늘 위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달빛.
비로소 물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임이 드러난다.
화면, 초조하게 흔들리는 달을 잠시 동안 바라보는데…….
순간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화면 안으로 확! 떨어져 들어오는 한 여인의 얼굴!
산산이 조각나 버린 달빛을 뒤로 한 채 서서히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여인.
작은 봇짐 하나를 품에 꼭 안고는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인의 창백한 얼굴…….

<FLASH BACK>

누군가에게 쫓겨 허억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의 힘을 다해 숲 속을 내달리는 여인.
사방을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온 몸을 긁어대지만,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앞을 향해 달려간다.
필사의 힘을 다해 끝까지 내달리다가 한순간 우뚝, 제자리에 멈추어 서는 여인.
산의 가장 끝자락, 절벽에 당도해버린 것이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있는 절벽을 감싸고 있는 검은 바다가 보인다.
절망한 듯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마는 여인.
탕!
한순간 울려 퍼지는 총성.

<다시 고요한 물 속>

여인의 곱고 하얀 얼굴 어디에선가 붉은 기운이 번져 나오기 시작하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여인을 지나 붉은 기운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부상하면…….
톡, 톡……. 수면에 떨어지고 있는 붉은 빗방울.
붉게 물들어버린 바다 위의 비.
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피와 붉은 비가 얽혀 서서히 글자가 되어간다.

혈(血)의 누(淚)


읽으면서 대체로 느끼는 것은 시작부터 꽉차있다는 것이다. 스릴러란 장르를 생각하면 구성을 앞뒤가 딱딱 맞게 해야 영화가 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짐작하건데 구성이 너무 꽉꽉차서 나중에 이야기를 고칠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싶다.

첫 화면은 슬픈 느낌을 주며 잔인한 살인들 뒤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14.당산나무 언덕 앞 (오후)

화면 가득 보이는 무원록의 시형도 몸의 각 부위를 표시해 놓은 인체 모형도.
시형도에는 앞면 쉰다섯 곳, 뒷면 스물  여섯 곳 등 모두 일흔 아홉 곳에 각 부분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안경을 쓰고 무원록을 바라보는 원규, 
상 위엔 김이 펄펄 오르는 조협수(소독제)가 사발에 담겨 있고,
망치, 물그릇, 소금, 식초, 밥, 술, 닭 등 응용법물(검시 도구)과 황종척(검험에 사용되는 자)이  놓여있다.
원규, 무원록을 덮는데 남 의원, 화첩을 손에 든 두호, 또 다른 두 명이 장막 안으로 들어온다.

장 호방
의원 남 가 입니다.
그리고 제지소에서 염료 일을 하는 두호라 하온데, 검시화를 그릴 것입니다.

원규에게 예를 취하는 의원과 두호, 두 사람(오작, 항인).

남 의원
(오작과 항인을 가리키고) 이 자들이 시장을 작성할 것입니다.
원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시작하게.

면을 조협수에 담갔다가 시체를 닦기 시작하는 오작.
항인은 황종척으로 시신의 죽창 찔린 부위 등을 재며 시장(검시기록)을 작성해 나간다.
두호는 종이에 시신의 상태를 세밀히 그리고
시형도를 토대로 시체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원규와 남 의원.

원규
피살자는 어떤 자였나?
장 호방(E)
장학수라는 자로 그 처가 병이 들어 오래 앓다가 죽었습니다. 오랜 병에 지극 정성으로 처를 구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그 처가 죽고 나서는 사람이 아주 달라져 하라는 일은 게을리 하면서 매일 투전판이나 기웃거리고 술에 취해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대동 굿을 하던 날도 선원들과 어울려 투전을 했다고 합니다.

오작과 항인이 항아리 속에 면을 넣어 술과 초로 적시더니 시신의 온 몸에 바른다.
시신의 몸 위에 천을 덮고는 다시 그 위에 면을 짜내 술과 초를 적시는 오작과 항인.
의원이 시신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원규가 탁자 위의 은비녀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종이를 뭉쳐 입 안으로 쑤셔 넣는 오작.

원규
피살자를 마지막으로 본 자가 누군지는 수소문해 보았나?
장 호방
예, 집에도 가지 않은 것 같고 선부장과 다툰 이후 만났다는 자가 없습니다.

잠시 후, 종이를 빼내고는 은비녀를 입에서 꺼내는 원규.
보면, 시커멓게 변해 있는 은비녀!
원규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야기 흐름과는 무관하지만, 시체를 검시하는 장면에서 지적인 호기심이 일고 그 생경한 장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작가가 자료조사에 지쳐서 이야기 꾸미는 데까지는 정신을 못 쓴 듯도 싶다.

24.창고 안 (밤)

어둠 속에서 구석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고 안.
소형 추(수갑)로 손이 뒤로 차여진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독기.
수척한 모습이지만 그 눈빛만은 매섭다.
철컹! 출입문이 열리더니 안으로 들어오는 호방.
입구를 살짝 살피고는 독기에게 다가간다.

독기
호장 어른!
장 호방
(나지막이) 내, 좀 전에야 자세히 들었다.
그 일 때문에 학수 놈을 없앤 것이냐?
독기
그 놈 입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소.
장 호방
그러게 어쩌자고 너희들끼리 일을 치룬 거야?
그리고 죽은 놈한테 죽창은 왜 꽂았냐?
독기
술에 독을 탄 것은 나지만
(답답한 듯 나직이 분을 삼키며) 내가 왜 그 딴 짓을 했겠소?
장 호방
(불안해지는) 네가 꽂은 게 아니라고?
독기
(목소리 바르르 떨리며) 대동 굿 때 만신의 목소리 그건 분명 강 객주의 목소리였소.
거기다가 혈우를 보았다는 소문까지…….
(호방을 바라보며 다급히) 어서 이 섬에서 나가게 해 주시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소.
장 호방
잘 들어! 어차피 내일이면 감영으로 호송될 거다.
내가 감영의 아전들에게 손을 써서 무슨 수를 마련해 볼 테니 입조심해라.
감영에서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나를 믿고 절대 입을 열어선 안 될 것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창고를 나가는 호방.
뭔가 궁리하는 듯 눈을 날카롭게 뜨고 이를 악무는 독기.

위 24씬에서보면, 장객주의 원한이라는 섬주민들의 동요에 대해서 적어도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다섯사람 - 즉 연쇄적으로 살해당한 - 의 이야기가 여기부터 현실적이지 않다. 피해자들은 살인자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야 했고, 섬을 빠져나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영화의 몇몇 중요 전환점을 놓치면서 이야기가 단선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36.허씨 집 마당

원규가 허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대청에서는 허씨의 처와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다.

원규
강 객주 일가가 처형될 때 두호는 어땠나?
허 씨
글쎄요. 두호는 도통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지고 그저 강 객주가 살던 집을 지키며 살 뿐입니다.

방에서 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던 허씨의 처가 방 안으로 들어간다.

원규
(방을 보며) 걱정이 많겠네.
허 씨
멀쩡하던 노인네가 강 객주 죽은 뒤로 정신을 놔버렸습니다.
원규
강 객주가 죽은 후? 왜? 강 객주 사건과 무슨 관계라도 있었던 건가?
허 씨
(놀라 손을 내 저으며) 아닙니다요. 나으리.
원규
그리 겁낼 거 없네.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허 씨
(눈치를 살피며) 그런 게 아니옵니다. 소인의 아비가 객주 살아생전에 크게 덕을 입은 일이 있사온데 한을 품고 죽은 객주가 해코지 하는 거라고들 합니다.
허 서방
(문을 박차고 나오며) 야! 이놈들아! 혈우가 내렸어. 객주께서 오신다! 이런 천벌 받을 놈들아. (허공에 연신 절을 하며) 객주 어른 잘못했습니다. 객주 어른…….
허 씨
(벌떡 일어나며) 아이고 아버지. 왜 또 그러슈. 왜 또-

허 서방과 허 씨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가만히 일어나 마당을 나서는 원규

원규가 조사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객주 사건이었다. 사실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조치일 수도 있다. 범인은 강객주 사건을 조사하길 바랬고 수사는 충실히 범인의 의도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강객주 일가 모함 사건’의 복수를 가장한 다른 범행일 수도 있었는데 수사 초기부터 혈우니 뭐니 하면서 섬의 분위기에 휩싸인 것은 방법이 좋지 않다. 다행히 진짜로 범인이 그 사건의 복수자라니 말 다했지만. 범인이 위 씬의 허사방이나 허씨였다면 혹은 처음에 잡혀온 독기였다면 어땠을까?

45.인권 처소 방 안 (아침)

높이 솟은 전각 마루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원규와 인권.
‘경염정(景濂亭)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마다 주렴이 걸려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마당은 아늑하고 잘 만들어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연꽃이 피었다.
수박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은 소리도 청명하다.

< 第 四 日 >

다탁을 내려놓고는 다기와 다반을 정성스레 상 위에 올리는 계집 종.
낡았으나 정갈하고 품위 있는 물건들이다.
다기에 차를 따른 뒤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가는 여종.
한쪽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잘 정리된 책들을 둘러보는 원규.
책장에 기대어있는 거문고가 인상적이다.

...(중략)...

인권
나으리의 선친께서 내셨던 문제, 제가 그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주는 한 섬도 가져가서는 안 되겠지요.
원규
그렇습니다.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 죽을 판일 테니 지주는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인권
(비웃 듯 바라보다) 하지만 난.  (순간 표정 매서워지고)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자비를 베푼다면 그 다음 흉년엔 곳간까지 열어달라고 할겁니다. 강한 자에겐 한 없이 비굴하고, 강한 자가 빈틈을 보이면 그 골수까지 파먹으려 드는 것이 저들의 마음이지요.
원규
인심은 위험한 것이라 과불급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동요하고 있을 때 몰아세운다면 민심을 수습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인권
뭍의 방식으로 모든 걸 판단하지 마십시오. 조공이 늦어지면 문책을 당하는 건 제지소의 주인인 영감이십니다. (부적 뭉치를 꺼내 놓으며) 일을 못하겠다고 버티던 자들이 제지소에 붙이려던 겁니다. 귀신이 두려워 무당에게나 몰려다니는 무지한 것들을 예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원규
(지지 않으려는) 범인을 잡으면 주민들의 동요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인권
(비웃듯) 다섯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입니까?
원규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찡그리고)  …….
인권
(잠시 표정 누그러뜨리고 다시 예의를 깍듯이 갖춰) 제지소의 초지공들은 제 방법대로 다스릴 테니 나으리께서는 그만 범인을 찾는데 매진하시지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범인은 죽은 애인에 대한 원한으로 사람들을 하나씩 처단하면서 이곳 섬마을의 인심( 강한자에게 비굴하고 약해진 자의 골수까지 파먹는다 )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자기 변명을 한다. 영화는 아래씬처럼 그의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말 말도 안되는 클라이막스를 맞는데 정말 끔찍하다.

103.제지소 앞

검은 구름 탓에 칠흑같이 어두워진 제지소 앞.
사령들, 목 뒤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홍사령을 업고 나온다.
그 뒤를 이어, 두호를 부축해 밖으로 끌고 나오는 사령들.
눈물을 흘리듯 제지소 벽의 나무 결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원규가 제지소 밖으로 걸어 나가자,
제지소를 빙- 둘러싼 채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는 마을 사람들.
손에는 낫이나 칼 등의 흉기가 들려 있다!
위기감을 느끼고 칼을 빼어드는 사령들, 사람들을 막아서는데,
자리에 멈춰 서서 두호를 주시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

원규
(무섭게 외치는) 뭣들 하는 짓인가! 물러서라!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두호가 죽어야 객주의 원혼이 분노를 가라앉힐 겁니다.
원규
(얼굴 무섭게 일그러지고) 이 자가 죽는다고 모든 것이 용서될 거라 생각하나?
너희들도 이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분노하는) 정작 객주가 모함을 받았을 때는 돈 몇 푼 때문에 외면했던 자들이 이제
다른 이의 피로 용서를 구하려 드는구나.
어서 길을 터라!

수발총을 그들에게 겨누는 원규.
흉기를 손에 쥔 채 살기 띈 눈빛으로 다가오는 주민들.
분노한 얼굴로 무리를 겨누고 있는 원규의 총 끝이 가늘게 떨려오고…….
그런 원규의 얼굴 위로 인권의 소리가 들린다.

인권(E)
쏴라! 네 손에 내 피를 묻혀라.
그러면 네 애비가 그랬듯이 앞으로 그 손에 더 많은 자의 피가 묻을 것이다.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에게 내 주시오.

원규가 망설이는 사이 사령들에게 쌓여있던 두호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사령들을 밀어내고 주민들 앞으로 나서는 두호.
두호를 끌어내리는 사람들.
사령들이 막아 보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광기에 쌓인 주민들에게 밀려나기만 한다.
쑥- 두호의 몸에 칼을 꽂는 허씨.
이내 사방에서 두호에게 달려드는 주민들.
낫과…… 죽창과…… 칼과…… 온갖 흉기들을 닥치는 대로 꽂아댄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힌다.
온 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서는 계속 두호를 난자하는 사람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하는 두호.
두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하늘로 솟았다가 비처럼 쏟아진다.
톡, 원규의 옷자락에 떨어지는 붉은 피.
툭 툭, 사람들의 얼굴 위로.
툭 툭 툭, 사령들의 옷자락에도 붉은 기운이 스며들고.
원규, 놀란 눈으로 하늘을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붉은 피!
마치 화폭에 붉은 물감이 뿌려지듯 서서히 붉게 채색돼 가는 사람들의 모습.
넋이 나가서 서 있는 원규와 광기와 공포에 빠져 있는 사람들…….
더 이상 볼 수 없는 듯, 고개를 돌리는 원규.


5. 살인자의 마음

영화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살인을 기대하는 작가나 감독 등등을 제외하고 살인자 자신을 생각해 보자.

김대두사건의 경우 범인이 체격이 작아 희생자의 반격우려가 있어 죽일 때 확실하게 처리한다는 것이 수법이 점점 잔인해지고 스타일화 되었다고 한다. 경기남부 연쇄살인의 경우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 잔인한 살인행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란 책에서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살인이 미친놈들이나 저지르는 것이 아닌, 이기적인 이유이든 혹은 유희적인 살인이든 개인적인 복수든 스타가 되고 싶은 욕망이든 그들이 인간의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니.

물론 저자는 짐승들은 그런식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저지른다는 측면에서 발언을 한 것이다.

살인자도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니. 정말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다.

각본: 이원재 / 감독: 김대승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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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순일 2018.10.14 23:0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기사 검색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글을 남깁니다. 지금은 정년퇴임하고 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덕분에 다른 유익한 글들을 봅니다. 늘 건강다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황순일드림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겨울에 어느 감독을 만났는데 양식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는 후배가 양식장에 와서 쓴 시나리오가 ‘송어’라고 한다. 그 감독과는 서로 대책 안서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몇 번 회의만 하다가 헤어졌다. 하기사 아직 데뷔 못한 작가와 데뷔 못한 감독이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 송어를 본 것은 케이블 TV에서 였는데, 그 감독의 사연을 듣고서 다시 보니 또 달랐다. 영화 속 양식장 주인과는 분명 다른 캐릭터였는데 남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이 영화는 고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비겁함과 광기와 폭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보통 전쟁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인간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서 보는 재미라고나 할까. 잘 익은 토마토를 누르면 사방으로 파편이 튀듯이 인간들도 살짝 누르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속을 내보이니 말이다.


일단 얘기의 발단은 소시민인 민수(은행대리)와 병관(갈비집 사장)이 휴가차 초야에 묻힌 친구 창현(양어장 주인)을 찾아가면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시골청년과 사냥꾼 그리고 검정개와 송어들이 이 좁은 골짜기에서 이들의 욕망에 동참한다. 



1. 캐릭터가 가져오는 불안


영화에서 처음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존재는 ‘창현’이다. 극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했는데, 다시 영화를 보다가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한 마디 대사에 웃음이 나왔다.


다름 아닌 아래씬에 나오는 ‘아무 생각도 안해’이다. 



보통 이런 말들을 내뱉는 사람을 ‘흥 깨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사회생활 하기에 조금은 힘든 너무나 정직하고 진지한 사람들 말이다. 조직 내에서 소위 ‘정치’를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힘들어 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26. 창현의 집, 마루                밤


모두 다 대마루에 앉아 창현이 생선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꺼내는 것을 본다.


민수  (저쪽 방을 보며) 저것들 벌써 나간 모양이지?

창현  원래 노루 사냥은 밤에 잘 되거던. 낮에 길목을 봐 뒀다가 밤에 서치라이트로....

병관  맞어, 노루는 밤에 빛을 만나면 꼼짝도 못한다며?


창현이 회를 쳐 상에 올리자 모두들 수저를 들지만 속도가 느리다.


창현  맛이 없니?

병관  그게 아니고.... 낮에 너무 먹었더니.

민수  시골에만 오면 느끼는 건데, 인간은 정말 먹고 자고 싸기 위해 사는 거 같아. 오늘만 봐도 그렇지, 도착해서 한 일이라곤 먹고 잔거 밖에 더 있나?

영숙  그래서 속 편한거 아녜요.

민수  (말없이 먹고 있는 창현에게) 넌 무슨 생각하면서 지내냐?

창현  ....아무 생각도 안해.


규칙적으로 잔을 비우며 밥을 먹고 있는 창현을 바라보던 정화


정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셔요?

민수  내 술 참견도 모잘라 창현이 술 먹는 거까지 챙겨 줄려고?


잠시 주춤하던 정화, 이내 감정을 바꾸며 민수의 팔짱을 낀다.


정화  당신 친구 잖아.

선화  그런데 저 모닥불은 뭐예요?


선화가 가리키는 곳에 모닥불이 보인다.


창현  (픽 웃으며) 태주가 사람들이 오니까 싱숭생승한 모양인데..

선화  싱숭생숭한데 불은 왜 피워요?

창현  (정화를 똑바로 보며) 안 그러면 자기가 거기 있는 줄 아무도 모르잖아요.

정화  ....

병관  우리도 불피워 놓고 한잔 더 하자.


상을 치우기 시작하는 여자들.


그 다음으로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존재는 무식하고 힘만 좋은 것으로 표현되는 엽사 1,2,3 이다. 도시에서 놀러온 두쌍의 부부에게 무차별적인 불쾌감과 굴욕감을 주는 무시하지 못할  이들의 힘은 그들의 짚차와 엽총으로 표현이 된다. 이들의 무례는 정도를 벗어나지만 독특한 면이 보이는 캐릭터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인가? 


#24. 진입로


총을 한 자루씩 들고 뚜껑없는 지프차에 타고 있는 엽사들 세명. 민수와 병관을 데리고 오는 엽사1에게.


엽사2  당신들 사냥하러 온 거요?

민수   (불괘한 표정으로) 주인하고 친구되는 사람입니다만.

엽사1  친구면 친구지 차를 아무렇게나 세우면 어떻게 해?

민수   아니, 말씀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엽사2  빼라면 빼지 말이 많아!

엽사3  젊은 양반들, 이 동네 처음 오셨나 본데 여기는....


병관이 뭐라고 말하려다 엽사들의 기세에 질린 듯 차를 옆으로 뺀 후, 내리는 병관, 이를 듣고는


병관   언제 봤다고 반말하는거요.

엽사1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했나.

병관   뭐? 이 자식?


병관의 멱살을 잡는 엽사1, 이에 병관은 맞붙을려고 한다. 옆에서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민수. 그때 

창현이 내려 오며,


창현   왜들 그러세요?

엽사1  (멱살을 놔주며) 주인 친구라니까 참는다.


병관이 터준 길을 먼지를 일으키며 올라가는 지프차.


민수  아니, 뭐 저따위 놈들이 다 있어?

정화  무슨 일이에요. 여보?

민수  가만 있어봐. 저 사람들 너희 집에 묵는 사람들이냐?

창현  니가 참어라.

병관  무식한 새끼들, 나이가 살려 줬다.


창현에 의해 못이긴 듯이 끌려 가는 민수와 병관.


세 번째 긴장감의 원인은 사냥개를 키우는 시골총각 태주(19세)이다. 민수의 처제 선화에 대해서 성적인 호기심을 보이는 그는 오해로 구타를 당한다. 그가 불안한 이유는 그가 대동하고 다니는 사냥개와 총에 있지 않다. 오히려 청소년들에게서 보이는 심리적인 동요와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무뢰배인 엽사들보다 순진했던 태주가 일방적인 총격전을 벌인 것도 그런 까닭이다.



2. 부적절한 관계가 낳는 불안


조연들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끊임없이 사건을 진행시킬 때, 주연들 또한 각자의 숨겨진 이야기로 나름대로의 극을 이끈다.


우선은 정화(민수의 처)와 창현의 관계가 부적절한 관계로 떠오른다. 정화는 결혼 전날까지도 창현을 찾아가 몸을 섞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그와 함께살지 못했다. 남편을 따라서 창현을 다시 만나지만 여전히 연극이나 했던 그 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현을 동정하기도 하고 술이나 마시며 세월을 보내는 그가 여전히 한심스럽기도 하다.



정화의 사진이 창현의 팜플렛 갈피에서 나왔기 때문에 민수도 이 양어장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한다. 정화는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찾아와서도 전애인 창현에게 소유욕을 보이며 동생을 질투한다. 정화의 이 신경질적인 상태가 시골청년을 두 번이나 오해 받게끔 하게 한다. 결국은 총격전으로 번진 사건의 시작은 정화이다.


두 번째 부적절한 관계는 창현과 선화이다. 선화는 창현이 언니의 전애인인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그에게 호감이 간다. 흔히 어린 처자들이 갖는 호기심과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자신감 때문이다. 선화의 눈빛이 언니의 신경을 긁고 동네 시골청년의 가슴을 긁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엽사2와 영숙(병관의 처)가 잠깐 덫에 걸린 토끼를 매게로 진짜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데 좀 웃기다. 영숙이 엽사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낯선 공간에서 오는 충동일 수도 있고 그저 자기를 여자로 봐주는 강한 남성에 대한 젊은 여자의 호기심일 수도 있다.



3. 이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불안의 실체


하나. 권력관계


영화에서 우습게 된 사람은 세 친구 창현, 민수, 병관이다. 민수와 병관이 별일 아닌 것을 크게 만들게끔 가장 큰 이유는 엽사들의 무례에 있다.


한국사회는 장유유서를 시작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사회적인 제약으로 사람을 상하로 분명하게 가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다. 그게 서로 속이 편하다. 직장이라면 나이보다는 지위가 우선한다. 이것이 가족이라면 나이와 사회적인 지위보다는 정해진 서열이 우선한다. 특히 남녀의 혼인으로 빗어지는 수많은 우스꽝스러운 호칭과 존댓말들을 보라.


민수와 병관이 엽사에게 분노하는 것은 처음보는 사람이 우선 반말부터 지껄이는데서 온다. 손위 사람이라도 해도 ‘젊은 사람들이’라고 시작하는 안하무인 태도는 상하 구분이 뚜렷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과 싸울 수도 없고, 이들은 따져볼 생각도 못한채 그들에게 ‘눈을 내리깔고’ 관계를 시작한다. 이것이 엽사들이 벌인 모든 시비와 행패보다 민수와 병관을 불쾌하게 한다.


극중에서는 친구들끼리의 돈으로 생기는 무의식중의 힘의 우위상태도 나타나고, 부부간의 권력관계도 상세히 보여준다. 부인 앞에서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남편이 참지 못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부분은 가부장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민수와 병관이 그토록 태주에게 화가난 것은, 태주가 선화를 성추행하려했다는 오해보다는 며칠동안 무시당한 자신들의 권위에 있다. 아래씬 태주의 대사에 그 부분이 나와있다.


#77. 양어장


태주, 흙투성이가 된 채 양어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고 그뒤를 민수가 쫓아간다.


태주  아저씨! 아저씨.


삽을 들고 일하던 창현이 놀라 바라본다. 이때 민수가 태주를 잡으려 하자, 얼른 창현 뒤에 숨는 태주. 민수

가 온길 쪽에서 병관이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달려온다.


창현 또 무슨 일이야?

민수 넌 가만있어. 이 자식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


... (중략)...


병관  너 일루 안 건너와!

태주  못 가!

민수  저 새끼 죽을려고.(돌을 집어 던지며) 너같은 놈이 우리처제를 넘봐!

태주  (돌을 피하면서) 에이, 좇 까!


이 말에 안색이 급변한 민수,


민수  저 쌍놈의 새끼


민수  이번에도 물을 건너려다가 옆에 있는 돌만 다시한번 주워 던진다. 태주 날아오는 돌을 잽싸게 잘도 피

해 하나도 맞지 않는다. 창현, 적극적으로 나서서 민수와 병관을 말리며,


창현  그만 가자. 가. 오늘 집에 가야 된다며.


민수와 병관 못이기는 척 창현에게 끌려가며


민수  놔!

병관  에이 시팔 참는다 참어.


병관,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돌 하나 더 던져보지만, 이번에도 피하는  태주. 체념하고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

기는 민수와 병관의 등뒤에다 대고


태주  집에 잘가봐라! 빵구난 차 가지고.


'빵구'라는 말에 민수, 병관 뒤를 돌라본다.


태주  그래, 내가 했다. 이 병신들아.


이 말에 안색이 돌변하는 민수와 병관. 민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을 첨벙첨벙 건너가 다짜고짜 태주를 

후려친다. 병관도 물을 건너가 민수를 거든다. 태주 맞으면서


태주  노루잡는 아저씨들한테는 찍도 못쓰면서 나한테만 지랄이야!


이말에 완전히 팩 도는 병관과 민수. 병관, 태주의 얼굴을 힘껏 후려친다. 비틀거리며 민수쪽으로 가는 태주

를 민수가 잡아서 머리를 물 속에 쳐 넣는다. 민수와 병관 이성을 잃었다. 민수, 태주의 목을 누르면서


민수  어디 물 속에서도 잘난 주둥아리 한번 놀려봐.

병관  어리다고 봐주니까... 이 놈의 새끼, 맛좀봐라.


...(중략)...



둘. 폭력


엽사들은 모욕적인 행동들로 자극 받은 민수와 병관은 태주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태주에게 똑같은 폭력을 당한다. 폭력을 휘두른후 민수와 병관은 마음을 가라앉힌게 아니라 스스로 이미 자기 정당성을 부여하고 태주를 더 나쁜놈으로 몰며 상황을 악화시킨다.


#46.  태주의 집 


고개를 바짝 들고 민수를 노려보는 태주. 

집안의 개들이 모두 미친 듯이 짓어대고 있다. 

병관,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돌아보면서, 


병관   이 자식좀 봐. 한 마디 사과말도 안하고 노려보는 것 좀 보게 ! 

민수   이 놈이.... 어른이 얘기를 하면 알아 들어야지 !. 


이때 들어서는 선화와 정화,

이를 느꼈는지 태주의 뺨을 후려치는 민수. 고개가 돌아갔다  원위치 되는 태주의 얼굴, 민수와 선화를 번갈

아 본다. 


정화   참고 내려가요. 병관씨, 네?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걸 가지고....


어쩔줄 모르고 서 있는 선화. 


민수   아냐, 이 자식 이거 아주 근본부터 못돼먹었어.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병관이 옆에서 태주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병관   눈 내리 깔어, 임마! 안되겠어, 경찰에다 넘겨 버려, 강간미수로.


갑자기 겁먹을 듯한 표정의 태주. 놀라 돌아보는 성희와 눈이 마주친다. 

태주.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고 개 쪽으로 달려간다. 태주. 아키라를 푼다. 

경악하는 민수 일행. 그때. 


창현   태주야, 임마! 무슨 짓이야! 


태주가 창현을 보더니 그대로 멈춰서 서럽게 운다. 중간에 납작 엎드려 태주와 창현을 번갈아 보는 아키라.

창현, 사태를 파악하려는 듯. 사람들을 둘러보다 정화와 눈이 마주친다. 외면하는 정화. 민수의 눈 속에 들어

오는 창현과 정화의 모습. 이를 느낀 듯 


창현   다들 내려가자. 


어색하게 서 있던 민수와 병관이 따라 내려 간다. 계속해서 산 속을 맴도는 개 짖는 소리.


태주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억울하게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선화앞에서 바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95. 양어장


양어장으로 들어온 사람들, 물을 건너 양어장 저쪽편으로 건너려 하고 있다. 창현은 총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이때, 양어장으로 몰려온 개들. 창현이 총을 겨눈다. '탕' 방아쇠를 당기자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간다. 세 마리 정도 꼬구라졌다.


창현  (선화를 보며) 빨리 건너가.


...(중략)...


태주  날 죽이려고 했지? 니네가 사람이야?

선화  (나서며) 잘못했어요. 참아요.


선화를 쳐다보던 태주,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며


태주  나, 김태주. 아버지가 이 나라의 기둥이 되라고 지어 준 이름이야! 이렇게 산  속에 개 키운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왜 나하고는 말도 안하려고 그러는 거야. 똑같이 산에 있어도 저 아저씨한테는 막 대주면서...


창현이 태주에게 달려들어 총을 뱄으려 하자 태주, 방아쇠를 당긴다.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창현. 사람들의 표정이 공포에 질린다. 쓰러지는 창현을 보고 태주 더욱 흥분한다.


태주  (총끝으로 민수와 병관을 가르키며) 니네 둘 무릎 끊고 빌어.


머뭇거리는 병관과 민수. 민수, 주변의 눈치를 사피다 엉거주춤 무릎을 굽힌다. 병관, 민수와 태주를 번갈아 

보고 망설이는데 이를본 태주.


...(중략)...


태주 니들도 한번 맞아야돼. 서루 쳐.


난처한 표정이 되는 병관과 민수, 머뭇거린다. 선화 태주에게 다가가


선화  태주씨, 이제 우리 둘의 문제 아냐!


야간 주춤하는 태주. 총구를 선화에게 겨누며


태주 비켜.

선화  (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못비켜!


태주, 순간 당혹감을 느낀다.


선화  나만 있으면 되잖아.


선화, 태주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태주, 시선을 외면하며 감정이 약간 일어난다. 총구가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사이 두사람 너머 상황을 살피던 네사람. 영숙, 말문을 연다.


영숙 (달래는 투로) 처음엔 총간, 우리한테는 고마운 사람이었잖아.

민수 그래, 사실 처제가 처음부터 잘못보고 오해해서 생긴일아냐.

영숙 그러게 행실을 좀 조신하게 했어야지.


순간  아랫입술을 깨문 선화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저쪽에서 민수, 병관일행 슬그머니 일어나 걸음을 옮기

려 한다. 선화이게서 민수, 병관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태주.


태주  안해!


머뭇거리는 민수와 병관. 태주 다가와 민수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고,  민수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눈다. 민수 

서서히 손을 들어 병관의 머리를 툭 친다. 병관도 받아서 툭 친다. 태주,  여자들에게 몸을 돌려 총구를 정화

와 영숙에게 들어대고


태주  장난으로 하면 죽어!


하며 철커덕 장전을 한다. 점점 광기가 깊어가는  태주. 민수, 병관 서로 얼굴을 보다가 민수  조금 더 세게 

친다. 병관은 인상만 긁고 있다.  태주 개머리판으로 영숙의 머리를 날린다.  푹 꼬구라지는 영숙. 이를 보고 

병관도 민수를 세게 때린다. 민수도 같은 강도로 때린다. 점점세지는 두 사람의 때리기.


태주  계속해 이 병신 새끼들아!


태주, 미친 듯이 웃으며 민수와 병관 앞에 총을 쏜다.


태주  더 세게


...(중략)...


마지막 씬에서 몰염치한 두 부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양어장의 고기들만 자살해서 하얀 배를 하늘로 한다.


확실히 그 불유쾌한 상황이 전쟁터가 아니어서 일상으로의 복귀가 빨랐나 보다. 아무래도 그 양어장에서 한 두명 죽었다면 좀 끝이 달랐을까. 특수한 상황의 권위의 상실과 폭력의 피해를 참을 수 없어하면서도 더 정교하게 그런것들이 남 몰래 일어나는 사회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오는 걸 보니 말이다. 


창현의 송어들은 그 깨끗한 양식장에서도 자살하는 걸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숨막히는 곳에서는 1초도 못 버티고 죽겠지... 끝으로 그 양식장 주인장께서는 부디 오래 버텨주시기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추신: 송어는 ‘스캔들’을 쓴 김대우씨의 시나리오다. 곧 개봉할 ‘음란서생’은 연출까지 한다는데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하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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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쯤 아마 5층짜리 낮은 시영아파트에 살 때인 거 같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니 베란다 유리창이 깨져있었다. . 언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애 둘이 유리를 깼다고 찾아왔더란다. 공 같은 걸 던진 모양이었다. 당사자인 범인은 아주 잘생긴 남자애였는데 장님이었다고 한다. 그 학생이 동생과 와서 사과를 하는데 언니들이 참 불쌍했다고 얘기를 했었다. 미남에다가 눈까지 안보인다니... 그 때는 무엇보다도 나만 그 남자를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본 후 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사뭇 달랐다. 그저 담담했던 대사와 지문의 행간 사이에 저런 화면이 나오다니 ... 좀 놀랐다. 그 신비한 느낌은 단지 이은주라는 배우에게서 묻어 나온 것일까. 


버스 운전기사인 그 남자와 예쁘지만 눈이 안보이는 그녀. 시쳇말로 그림이 된다. 게다가 분위기 까지 사는 것은 이 영화에는 현실과 충돌하는 판타지가 있기 때문이다.


경우(이은주)가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애인이 강의하는 곳을 찾아갈 때부터 영화는 현실을 배반한다. 장님 친구가 없으니 실지로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책이나 기타 매체에서 접한 그분들과 그녀 ‘경우’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당당한 그녀는 상담이라는 자기 일도 가지고 있고, 버스가 늦게 오면 기사아저씨에게 호통도 칠 줄도 안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죄송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분들은 눈이 예쁘지 않다. 그런데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니는 ‘경우’는 눈까지 이쁘다. 정상인으로 태어났다면 훨씬 맑았을 그분들의 눈이다.


8. 버스 안 - 밤


꽉 막힌 사거리에 서있는 버스 한 대. 

“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

달리는 시내버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스기사, 상현. 대단한 음치지만 내내 흥겨운 표정.


화면 바뀌면, 꽤 헐렁해진 도로를 달리고 있는 버스. 흘러나오는 느끼한 디제이 멘트. 주절주절...

저 멀리, 어두운 거리에 밝게 빛나고 있는, 정류장이 보인다.

정류장에 홀로 서있는 누군가의 실루엣.... 점점 가까워지는 상현의 버스.....

마침내 끼이익..... 버스가 정차하고, 덜컹.... 문이 열리면...드러나는 경우의 모습.


경 우 (문 앞에 다가와) 아저씨. 133번 버스 아닌가요?

상 현 네, 맞습니다.

경 우 (표정변화) 133번 맞아요?

상 현 네.


바둑이를 앞세워 올라타는 경우, 타자마자,


경 우 (버럭)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해요!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요? 

 시골버스도 아니고, 무슨 시내버스가 30분만에 와요!

상 현 (황당한) 차가 막혀서...... 


상현의 말은 듣지 않고 자리로 가는 경우.

룸미러를 통해 경우를 보는 멍한 얼굴의 상현.


경 우 (상현에게) 안가요? 


그제야, 얼른 시선을 거두고 차를 출발시키는 상현. 다시 한번 경우를 본다

여전히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방송


소 리 이어서 계속 노래 듣겠습니다.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조용필의 단발머리 그리고 역시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경우, 앉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더니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룸미러로 흘긋거리는 상현, 문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깜짝 놀라 피하는 상현... 잠시 후, 다시 흘긋거린다

'그대발길이 머무는 곳에...숨결이 느껴지는 곳에...서울의 밤거리를 달리는 상현의 버스

f. o


실제로 영화에서는 133번이 아닌 154번 버스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경우’가 기사아저씨에게 호통치는 이 장면이 특히나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필시 상현이 한눈에 경우에게 반했으리라.


책, 영화, 만화에서 다루는 로맨스는 사실 여성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돈 많고 멋진 남자와 보잘것 없는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만족을 대신 채워준다. 영화의 어떤 장르보다도 오래된 것이지만 장르적인 관습을 벗어나기 힘들기에 항상 끝이 뻔하다는 온갖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난다면 결말은 두가지다. 사랑을 하거나 헤어지거나. 그래도 우리는 밥맛이 어떤지 알면서도 매일 먹듯이 두 주인공이 어쩌구 저쩌구 할 것 알면서도 묵묵히 그 과정을 지켜보게되는 것이다.



‘품행제로’나 ‘안녕 UFO'는 남자의 시점으로 사랑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뻔할 수 밖에 없는 로맨스를 살짝 비튼다. 여성의 판타지를 대신한다는 목적을 상실하면서 관객수가 적을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지만 약간은 색다른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면에서, 시나리오를 같이 공부하던 한 남학생이 쓴 로맨스를 보면서 던진 한마디가 후회가 되기도 한다. ‘여자들이 이 영화 돈 주고 볼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로 돌아가서 ‘상현’은 뭇여성들의 기대를 저버린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직업도 변변치 않지, 얼굴도 아니지, 남성적이지도 않지... 게다가 착하기까지 하다. 실제로는 정을 주기는 쉬워도 사랑까지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 소위 운명적인 사랑을 하기에는 좀 그런 캐릭터다. 상현이 경우를 좋아한건 그녀가 예뻐서만은 아니리라. 그들의 사랑이 현실에 반하는 두 번째 판타지다.


32. 경우 집 - 낮


분주하게 오가며 이것저것을 치우는 경우.

지나치게 반듯하게-경우만의 식으로- 정돈된 실내를 마치 보이는 듯 자유롭게 오간다.


경 우 미안해. 너 오기로 한 걸 깜박했어. 아직 세수도 안했는데...(히죽.)


입구에 뻘쭘하게 서있는 상현.

어색하지만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 바짝 올려 맨 넥타이... 반듯하게 갈라 넘긴 앞머리...

손에는 가루비누와 화장지, 커다란 수박 한 통이 들려있다.

벌써 상현 앞에 벌렁 드러누워 애교를 부리고 있는 바둑이.


경 우 (환하게 웃으며) 뭐 사왔니?


화면 바뀌면. 테이블에 마주 앉은 상현과 꽁지머리를 질끈 묶은 경우.

피자를 물고 있는 두 사람. 

방안을 둘러보는 상현. 달력 한 장 없는 휑한 벽면.

냉장고에 욕실 타일처럼 반듯하게 붙어있는 사진들을 발견하는 상현.

카메라가 사진들을 훑는다. 유에프오 사진.... 대학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 중 어린 경우가 부모님과 찍은 사진이 눈에 띈다. 외국의 어느 곳인 듯한 배경.

상현에게 와서 피자를 달라고 꼬리치는 바둑이.

경 우 이거 다 먹으면 니가 치워야 된다. 안그러면 개미생겨.


...(중략)...


상 현 (꼴깍... 타이가 답답한 듯 끌어내린다)


잠깐 어두워지는 경우. 그러다 문득,


경 우 ...... 아.

상 현 ......?

경 우 잘됐다. 너 온 김에 목욕하자.

상 현 ?


화면 바뀌면. 욕조에서 발버둥질 치고 있는 바둑이.

팔다리를 돌돌 걷어올린 상현, 물범벅이 돼서 바둑이를 씻기고 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욕조에 매달리는 바둑이. 이내 비눗물을 사방에 턴다.

비누 범벅이 되는 상현, 얼굴에 묻은 비눗물을 닦는 사이. 상현에게 찰싹 안기는 바둑이.


화면 바뀌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상현.

좀 떨어진 곳에 경우도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 음악소리도 없이 조용한 실내.

경우, 갑자기 상현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경우의 갑작스런 행동에 흠칫하는 상현. 

눈을 감고 상현의 머리 냄새를 맡는 경우.

유혹할 의도는 전혀 없는데 그래서 꽤 유혹적인 경우의 작은 표정 변화들...

그 얼굴을 보다가 말다가 보다가 마는 상현.

그 동안 실내가 너무 조용해졌다.... 침묵을 깨는,


...(중략)...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핸디형 녹음기를 찾아내는 경우, 테입을 맨 앞으로 돌린다.


상 현 뭐야?

경 우 녹음기... 나한테는 사진기...

상 현 (녹음기와 경우를 번갈아 보는)

경 우 (버튼을 누르고) 동네 친구 박평구군과 함께하는 첫번째 일요일입니다


상현, 경우를 한 번 보고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녹음기를 상현쪽으로 들고 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

상현, ‘꿈은.....’ 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따라 웃는 경우. 나란히 앉아서 깔깔대며 웃어제끼는 두 사람.

웃다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깊게 숨을 마시는 상현.

경우도 웃다보니 갑자기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가만히 상현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찾고... 입술을 찾고...

그대로 경우를 보는 상현... 가만히 다가가 입을 맞추는 경우....

상현, 뒤로 주춤하다가 같이 다가든다.... 야곰야곰야곰..... 

공허하게 눈을 뜨고있는 경우... 손가락으로 상현의 눈을 가만히 닫는다.

눈을 감은 상현.... 잠시... 살며시 떨어지는 경우... 눈을 뜨는 상현...


경 우 우리... 이래도 되나? 만난지 5일밖에 안됐구...

    아직 서로... 잘 모르구... 그리구...(잠시)... 넌 내가 아무렇지도 않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경우. 

상현... 무슨 말을 해야할지...


경 우 평구야...

상 현 ......

경 우 (얼굴을 감싸쥐며) 으... 쪽팔려라...

상 현 .........

경 우 (피식 웃고) 나 왜 이러지? 너한테 자꾸 실수만 하고...

상 현 .........

경 우 ..... 우리 이렇게 더 있다간 진짜 복잡해지겠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경우. 가는 경우를 보다가...

상현, 그때까지 참았던 숨을 내뱉듯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이사오면서부터 복덕방 할아버지에게 UFO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UFO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그녀의 말에 할아버지는 이쁜 할망구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보이기도 한다. 유도복이며 번개전자 사장이며 복덕방 할아버지며 모두 그녀의 말에 관심을 귀울여 준다. 그녀가 벌이는 깜찍한 UFO 소동에 동네 주민들이 휩쓸리게 되는 것이 세 번째 판타지이다.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위에서 말한 현실에 반하는 것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한 관객의 바람이기도 하고 세상을 따뜻하게 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 수많은 작은 배려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주인공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는 끝내 ‘그녀는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95. 경우의 집 - 새벽


온통 젖어있는 경우의 방. 장판 위로 찰랑찰랑 남아있는 물.

침대에 쓰러지듯 이불을 내려놓는 상현.

거친 호흡. 땀으로 범벅인 얼굴. 힘겹게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보면, 변기 위. 그 자세 그대로 꼼짝 않고 앉은.... 경우.

한동안 보는 상현의 눈빛. 


상 현 ........ 여관으로 가는 게 안 좋겠어.....? 

경 우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상 현 경우야.....

경 우 ...........


아무 반응 없는 경우. 꼭 다문 입술.

상현의 시선에 경우가 꼭 붙들고 있는 핸드폰이 들어온다.

깜빡이는 핸드폰 램프. 그걸 보는 순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현.


상 현 너... 지금 이게 말이 되니?

경 우 ......

상 현 ... 나는... 걱정돼서 잠도 못자고 왔는데...

    이렇게 있을 거면서 너..... 도와달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니?

    너.. 그 사람 다시 만났잖아... 나는 정말... 너... 모르겠어... 

    물 무섭다면서... 싫다면서... 이게 말이 되냐구?!

경 우 .......

상 현 뭐라고 말을 좀 해... 정말 ... 답답하게 그러지 말구! 

경 우 ... 니가 뭘 알어? 니가 날 알어?

상 현 지금 그런 게 중요하니? 중요한건....(멈추는)


경우가 울고 있다.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경우를 보는 상현.


경 우 난 이게 중요해!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난 이게 중요하다구... 말을 하라구? 뭘 말하라구?

    너한테 전화 안했다고 이러는 거니?

상 현 ......

경 우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뭘 말할까?... 난 그냥 이런데...

상 현 ......

경 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전화 했었어... 

    너한테 안한것 뿐이야... 


두 사람 사이. 건널 수 없는 침묵.....

상현의 입가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한숨.

상현, 경우를 보지만..... 고개를 돌린 경우.

상현..... 천천히 돌아선다.

경우의 집을..... 나간다.

꼿꼿한 경우의 얼굴에 굵은 눈물이 떨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부분에 중요한 대사가 더 나온다. 


상현  나한테 전화 안한게 정말 화가나. 난 정말 너 모르겠어.

    도대체 네 마음이 뭐니, 난 뭐냐. 난 뭐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니.

    어떻게 한번도 솔직하지를 않니.


경우  넌 나한테 솔직했어? 왜 다들 나만 갖고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뭘 바라는데.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뭘 도와주겠다는 거야. 언제까지 도와주겠다는 거야.

     넌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건데...


영화에서는 ‘경우’가 UFO를 바라는 것은 어린시절의 경험처럼 한 번 더 눈을 떠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경우에게 UFO가 바랄 수 없는 희망이나 보이지 않는 지표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경우’의 UFO는 그냥... 상현의 전인권 반지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취미 같은 거 말이다. 


철지난 'Be the Reds!'를 입은 사람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며 2002년 월드컵 때보다 후의 영화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묘하게도 영화는 더 이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비현실적인 많은 부분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영화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대 초의 우리의 모습을 왜곡하지 않고 잘 그려내고 있다. 동시대를 산 같은 또래만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것들. 


가끔씩 외국영화를 보며 ‘쟤네 왜 저래’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 있었는데... 필시 외국인들이 보면 이해 못할 몇 가지 장면들이 있으리라 지레 짐작하면 기분이 좋다.


마지막으로 요즘에 푹빠져서 보는 ‘그여자’란 드라마에서 언급된 시를 읊으며 상현의 가슴속에 들어왔던 ‘경우’를 추억해 본다.




“나의 꽃 ... 한상경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서가 아니다. .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 속에 이미 피어 있기 때문이다.”




PS : 

고은님이 ‘번지점프를 하다’로 한방에 스타가 되었다면 인터넷 사이트로 스타가 된 분이 있다. 이해준과 이해영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이들의 ‘품행제로’트리트먼트는 작가지망생들이라면 모두 보았을 듯싶다. 가끔 들리는 곳인데 영화만큼이나 신선하다. 

대부분 시나리오 작가들의 필로그라피가 우왕좌왕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그런대로 자기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어 반갑다.


각본: 김지혜, 이해준, 이해영 / 감독:  김진민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2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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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면서 쓴 첫 번째 시나리오가 ‘솔병초입대명’이라는 말도 안되는 사극이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여 대사가 있는 등장인물이 스무명이 넘었었다. 전쟁도구나 방법이 있는 문헌을 찾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몇 가지 병서와 박물관 유물을 참고했었다. 앞으로 주인공은 두 명으로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는 주위의 충고로 그 뒤로 내리 로맨스만 써댔는데 역시나 필자는 ‘사극’이 좋다. 그 뒤로 로맨틱 드라마, 로맨틱 호러로 장르를 넓히고 있는데 다음은 로맨틱 사극을 써야겠다.


최석환씨가 쓴 ‘황산벌’은 아무래도 전쟁이야기를 풀어가다보니 소설처럼 여기저기로 이야기가 분산이 되어 끝에 힘을 잃은 감이 있는데, 다음 작품 ‘왕의 남자’에서는 제대로 인물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거나 역사를 재해석하는 영화는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해야 영화가 산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계백(박중훈)과 김유신(정진영)에 좀 더 집중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 그래도 이 영화는 감히 꿈꾸지 못할 유쾌한 상상으로 가득 차있다. 각 지방 사투리를 쓰는 상상도, 거시기한 갑옷에 관한 비밀도, 정치적 풍자도, 각 전쟁장면은 다시 봐도 즐겁다.



I. 전쟁


역사의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영화는 필자처럼 무식한 관객이 어디부터 어떻게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정치적인 풍자를 넘어서 어느새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탐색전, 신경전, 맞짱, 심리전으로 네가지 싸움이 차례로 시전이 된다. 시나리오랑 순서는 다르지만 무작정 검과 창을 들고 나가 진법을 펼친 게 아니어서 사뭇 흥미가 있었다. 전쟁 참 복잡하게 하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해 김유신은 아래씬에서 ‘전쟁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라며 이 무지한 후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29.김유신 사령부-오후

모여앉아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김유신, 김법민, 흠순과 장수들. 


김품일

내일이데이 내일! 

지금 저런 짓하고 있을 짬이 없데이.


김흠순

하모! 계백이 아~들한테는 저런거 안통한다카이.


김법민

약속날짜 못지키면 누가 책임 질끼고? 

이거는 참수형감이데이, 참수형! 지금 총공격 해야된다 안카나! 


김유신 

(서늘한 눈빛으로 법민을 보며) 총공격?! 지금 하까? 


김유신,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군막을 뛰쳐나가, 

미친놈처럼 “전군 공격! 공격하라! 전군 총공격하라카이!”를 외치고는 다시 들어와 


김유신 

(비웃으며)니 봤제? 총공격 안하네! 

전쟁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데이. 


김법민 

절차 따지다 황산벌에서 늙어 죽을끼요?!


김유신

느그들은 모린다. 전쟁이 뭔지. 

지금 총공격하믄 그건 몰살이데이.

계백이 지 처자식 죽이고 나온거 보래이. 

그래서 계백이 갸가 무서운거래이. 

갸는 그거 한방으로 병사들 독기를 확 올려 뿐 거 아니가.


김흠순

그람 우얄낀데?! 우리가 집에 가 처자식 다 쥑이고 올까? 

그라믄 전투할끼가?


김유신

가만 있어바라,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선다. 

천존, 계백이한테 장기 한판 두자케라.


전쟁은 코믹하게 진짜 우습지도 않게 전개되다가 드디어는 그 광기를 드러내게 된다. 


44.신라 방패진영 앞-낮 

관창의 베인 머리를 달고 돌아온 말. 

김품일, 아들 관창의 머리가 담긴 보자기를 부여잡고 비통해하고 있다.

그 뒤에 서있는 김유신과 김법민, 김흠순, 천존과 장수들.

관창의 죽음을 맞이하는 병사들의 공포에 젖은 표정.


신라병사2 

김유신이가 불리하면 꼭 써묵는 수법 아이가? 


신라병사3 

저 짓도 한두번이지 저런다고 사기가 올라가나? 


김유신, 아들들을 잃은 김흠순과 김품일의 슬픔을 애써 외면한 채 

흐린 하늘을 보고 있다가... 


김유신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 


김흠순 

행님, 니 미칬나?! 


김유신 

그래 미칬다! 

전쟁은 미친놈들 짓인기야!! 

지 가족 모두 처죽이고 나온 계백이가 제정신이가? 

글마가 미치면 내도 미친다. 

미친 놈한텐 미친 놈이 약인기라! 

니 죽기 싫으면 가만 잇그레이... 

분위기 잡혀가는데 산통깨지 말고. 

(모여있는 화랑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화랑들을 계속 보내!  

꽃은 화려할 때 지는기야! 


싸늘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김유신. 


54.백제군 구령대 앞-오후 

중장갑으로 무장한 기마병과 보병(100명 정도)들을 모아 점검하는 계백. 

계백이 눈짓을 하자 한쪽에서 누군가 백마 한 마리를 끌고 나오고, 

이어 장수1이 칼로 백마의 목을 벤다. 

쏟아져 흐르는 백마의 피를 손에 묻혀 한명씩 차례로 입술에 쓱- 칠한다. 

계백 이하 장수들, 병사들의 얼굴이, 전율이 흐를 정도로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다.

계백, 병사들의 의식이 끝나자 칼을 뽑아들고, 


계백

자랑스런 백제의 아그들아, 

머덜라고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발른거시더냐?

고거슨 바로 죽음의 맹세가 아니더냐?!

사는 것은 불확실한거시다. 

이 징헌 놈의 인간시상에 확실한 것은 딱 하나 뿐이여. 

그것은, 사나이가 미련과 변명을 버리고, 

아쌀하게 거시기하는거다! 

우리 오늘, 여그 황산벌에서, 아쌀하게 거시기해불자!!! 


장수1/병사들

(장수1의 거시기 선창에 따라 병사들 해불자고 복창한다)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입술과 얼굴에 붉은 바디페인팅을 한 붉은 악마들의 응원 같은 분위기다.



II. 정치


전쟁은 정치 때문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전쟁을 위해서 정치가 필요하기도 하다. 

전자에 대해서는 당의 힘을 빌어서 백제를 칠 수 밖에 없었던 신라의 정치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일반적으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기 위해 장수들이 펼치는 전략(선)과 전쟁의 전후처리문제 협상(후)을 말한다.

이 영화는 한국사람, 그것도 중등교육이상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 보아야 재미있다. 왜냐하면 전쟁이 필요한 정치적 배경의 설명 없이 바로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래 첫씬에서 각 나라 대표 뒤에 써 있는 글자를 극장에서는 몰라보았으나 집에서 다시 보니 나라의 이름이 아닌가. 의자왕 뒤에는 백제의 ‘濟’, 무열왕 김춘추 뒤에는 신라의 ‘羅’, 연개소문 뒤에는 고려의 ‘麗’, 당황제 뒤에는 ‘唐’ 깃발이 있으니 말이다. 

아무렴 어떠랴 상당히 희화화된 삼국시대 각 나라 대표들과 당황제의 대화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래로 사대주의적 사관에 찌든 우리에게 약간의 쾌감을 준다. 당황제를 향한 연개소문과 의자왕의 발칙한 대사도 우습지만 특히 당황제와 미국 부시의 ‘악의 축(axis of evil)' 발언이 묘하게 겹쳐지며 속이 조끔은 시원해진다.


1.군막 회담장-낮

당이란 로고에서 카메라 트랙 백하면 당황제와 의자왕, 김춘추, 연개소문이 회담을 벌이고 있다.   


당황제 (중국말-자막)

현재 동북아의 긴장은 대당제국이 정한 국제질서를 

고구려와 백제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 모두가 이 황제의 백성일진데, 짐이 부덕한 소치로다.


연개소문 

우리가 와 니 백성이야?!

니들 당나라 몇 년 돼서?! 50년도 아니되지 않았슴메?! 

우리 고구려는 700년 돼서, 700년, 알간! 


당황제(중국말-자막) 

연개소문, 그대가 천하의 질서를 어기려 하는가?!


     연개소문 

질서 누가 정하는 건데??!  


당황제(중국말-자막) 

그 질서는 하늘이 정했고, 짐은 하늘의 아들 천자다! 


연개소문 

니 아바이 당태종이가 형제들 쳐죽이고 황제된 것도 하늘이 정한 질서냐?! 


김춘추 

니 진짜 무식하데이, 황제께선 정권의 철학적 정통성을 말씀하고 안있나? 


연개소문 

정통성? 그래, 나는 쿠데타 일으켜 정권 잡았다 와?! 

김춘추, 니, 반쪽짜리 왕족 주제에, 김유신이랑 짝짜꿍해서 정권 잡지 안아서?! 

의자왕, 니 애비도 서자 아니어서?!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 어딨서? 

떼놈들이 인정해주면 그게 정통성인가?

전쟁은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기야. 


의자왕 

맞제, 고것이 정치적 경륜이제! 


김춘추 

정치적 경륜?! 하루가 멀다하고 쳐들어와 남의 백성 쳐죽이는게 경륜이가?! 

니 놈 왕되고 지난 20년간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날 없었데이!! 


의자왕 

아 즉위 초기에 정권장악허고, 국론통일 할라믄 다들 하는거 아녀? 

우리 선수들끼리 지난 야그는 허지 말자. 

  ...(중략)...


 당황제(중국말-자막) 

그만! 짐이 이번에 개입한 이유는... 

(참다못해) 너희들이 막나가니까, 나도 노골적으로 말하겠다. 

강대국이 까라면 까! 


의자왕 

뭘 까라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랑께. 

  

당황제(중국말-자막) 

첫째! 조공문제...

조공은 황제가 정한 국제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약소국들의 의사표시다. 

헌데 너희 백제놈들, 왜 고구려와 짜고 신라의 조공길을 막나?! 


의자왕 

아따 김춘추 저거시 싸가지 없게 노니께...


당황제(중국말-자막) 

둘째! 우리 당나라 기술자들을 돈으로 빼돌려서, 

초강력 쇠뇌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속셈이 뭐냐?! 


의자왕 

그건... 순수민간차원의 과학기술교류라고 보고 받았는디... 


당황제 (중국말-자막) 

셋째! 고구려는 우리 당나라가 극구 만류한 천리장성을 축조해

주변국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연개소문 

이 종간나 새끼?! 내가 성을 쌓던 부수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함 해보자 이기야? 


김춘추

이놈이?! 감히 황제에게...


연개소문 

뭐이 어드레?! 김춘추, 너, 옛날에 내가 뭐라했서. 

고구려,백제,신라가 힘을 합쳐 저 당나라 새끼들 박살내자 아니했슴메?!  

 

당황제(중국말-자막) 

개소리!! 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천하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선포하는 바이다!! 

   

김춘추 

하모, 저것들은 악으 축 정도가 아니라, 악으 덩어리라카이! 


연개소문

무스거?!(벌떡 일어나며)

  ...(중략)...

                  

김춘추 

(의자왕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니는 내 손에 죽는데이!


    의자왕

음마? 시방 선전포고하는거여 뭐여?



전쟁이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짓거리인지 백성만 쳐죽이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만은 확실히 제대로 표현했다.

아래씬에서의 김춘추의 발언들은 그런면에서 정말로 깜찍하다.


6.금돌성 김춘추 캠프(안)-밤

...(중략)...

김춘추 

언제, 내는 당나라 황제하고 얘기 다 끝났다 아이가?

소정방이는 처남이 맡아주소.

그카고 절대로 소정방이 비위를 거슬리면 안된데이. 


김유신 

와?  


김춘추

황제가 전쟁 끝나면 대동강 이남은 내게 준다켔다.

소정방이가 딴소리 몬하게 그걸 분명히 해라!


김유신

그기 단교?


김춘추

이번 전쟁으로 우리가 뭘 얼매나 얻느냐는 전적으로

대장군이 하기에 달린기라.


김유신

잘몬하면 내 탓이고 잘하면 다 매제꺼네?


김춘추

근데, 대장군 니, 말투 좀 가려하면 안되나?

우리 신라는 다 좋은데, 우아래 없는 말투는 싹 뜯어고쳐야 한데이.


김유신

그기 우리 신라 전통 아니가? 

얼매나 살갑고 좋노... 전하. 


김춘추

됐다 고마, 출발하그라.


김유신 휙 돌아나간다

김춘추, 김유신 나간쪽을 보고


김춘추 

절마 저거...

(법민에게) 이 전쟁은 이미 끝났데이. 

전투는 요식행위고, 인자 전후처리 문제만 남은기라. 


숨어있던 신라협상대표가 나선다. 


    김춘추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곤)

전후처리 협상대표로 너를 따로 보내는 이유를, 니 알제?


신라협상대표 

예, 전하...


김춘추 

내는 이제 김유신이 같은 꼰대들은 안믿는데이. 

니같은 젊은 피를 믿는데이. 

이번 협상에서! 

(의자에서 일어나) 

의자왕의 신병처리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해야 한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의자를 발로 차며) 

의자왕 그 새끼를 쳐죽여가 내 딸내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카이!!  

니는 그것 해내면 출세하는기고, 

그것 몬하면 내 손에 죽는데이. 알것나?! 알것제!! 


협상대표 

(사색이 되어) 

예, 전하.


협상대표를  물러가라고 손짓해서 내보내고  


김법민

내는 완전히 깍두기네... 

                     

김춘추

니는 태자 아이가. 내 담엔 니가 왕이야. 

김유신이 글마가 기회포착하는덴 귀신이데이.

니는 그걸 배워야 한데이.

            

김법민

내는 외삼춘이 무섭다.


김춘추

이번 전쟁에서, 글마가 왜 무서븐지를 배우란 말이다.

니 적은 백제가 아니라 김유신이데이.

...(중략)...


전투는 요식행위라며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후처리 협상부터 시작하는데서 김춘추의 정치 9단 솜씨를 엿볼 수 있지만, 군자가 취할 행동은 아니다. 손자병법에도 ‘전쟁을 하는 방법으로 적국을 손상시키지 않고 항복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며, 격파해서 항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란 말이 있지 않는가. 애초에 이 전쟁은 목적도 수단도 과정도 후세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 결과론적으로 보아도, 신라가 삼국통일로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고구려의 후예 ‘발해’의 존재가 너무 크지 않은가 말이다.

불손한 후손의 정치적 풍자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쌀배달’이라고 명명된 보급품 지원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13만 대군의 보급품을 대기로 했던 신라의 행동을 두말하지 않고 쌀배달이라고 칭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쌀배달은 이 때뿐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는 조선에게 쌀배달을 시키지 않았던가. ‘징비록’이란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제학 류성룡은 심지어 명나라 사신 앞에 무뤂을 꿇고 눈물까지 흘렸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키듯이 쌀을 달라면 쌀이 오냔 말이다.


53.김유신 사령부-오후 

장군들 김유신을 필두로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법민 

공격은 언제 시작하능교?


김유신 

(생각을 정리하며 뜸을 들여서)

...법민아, 니는 내 조카제?


    

김법민

(머쓱해하며)예.


김유신

흠순아. 닌 내 동생이제?


 김흠순

하모.


김유신

김품일이 닌 법민이 사돈이제.


김품일

예,대장군.


김유신

그러니까 우리는 다 친척이제?

남이 아닌기라.


    법민, 흠순, 품일

(서로 눈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


    김유신

이중에서 법민이는 왕이 될끼고, 우리는 대신라국의 자랑스런 장군이 되가

법민이를 도울기다. (사이) 우린 당나라를 위해 사우는기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우는 기다. 알긋제?

우린 우리 자신을 위해 살배달 가는기다. 분명하제? 

우린 남이 아니제? 우리가 남이가?!


    법민,흠순,품일

아닙니더!


김유신

인자부터 싹쓸어 버리는기라. 각오됐나?!


법민,흠순,품일

(우렁차게)예!!


뻐꾸기1,2 뛰어 들어오며,


뻐꾸기1 

대장군이 하라는대로 켔드마는... 


뻐꾸기2 

분위기 금방 잡히데예. 


김유신 

욕봤데이. 

(장수들에게) 

됐다. 가자. 인자 우린 이긴다!!

전쟁에는 역시 정치가 중요하다. 세치 혀가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III. 개인의 역사


영화는 대체로 백제의 계백장군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끝까지 영화를 보게 되면 주인공이 김유신임을 알 수가 있다. 아무래도 영화적인 상상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그리되지 않았나 싶다. 

영화는 사극에다가 전쟁까지 있어 수많은 배역들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몇몇의 개인을 지목해 보자. 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했던, 원치 않던 간에 이름을 남기고 죽었다.

첫 번째, 계백의 처자이다. 순순히 죽었으리라는 상상이 약간 빗겨나가며 그동안 영웅적인 행동으로 떠받들렸던 계백의 행동이 목적을 잃는다.


58.계백의 집-밤(14씬 연결, 회상)


계백 

그거 마시고 죽을겨, 내 칼에 죽을겨? 

(벙찐 가족들의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표정) 

이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너희들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어라. 


계백처 

뭐시라고라, 시방 이녁이 그런 말 헐 자격이 있당가요?! 

그러면 우덜이 아이고 서방님, 아이고 아부지, 

이 사약 먹고 디질다 그랄줄 아셨소? 

에끼, 이 냥반! 


계백 

(칼을 치켜들며) 

이 에편네가! 


계백처 

시방, 내 생떼거튼 새끼들헌테 자진해서 디지라고라. 

씨만 뿌려놓고 전쟁터만 싸돌아댕긴 인간이 

이제 와서 뭐시라고라! 


방밖 마당에 구부정히 석상처럼 서있는 팔매. 


계백 

이 예펜네가 환장을...


계백처 

그려 환장했다 왜?

내가 결혼해서 이날 이때까지 악밖에 안남은 년이여! 

옘뱅하고... 이 인간이 니가 해준 게 뭐있다고... 


계백 

이 여편네가 미쳤나?! 


계백처 

전쟁을 하든 말든 나라가 망하든 말든, 

그거시 뭐인데 니가 내 새끼들을 죽여! 

(계백 칼을 치켜들고 죽이려 하자, 계백 아들딸들 계백처 뒤로 숨는다) 


계백처 

니 애비 에미가 살아 있으면, 니 애비 에미도 이렇게 죽일껴? 


그 말에 계백 주춤하고, 


계백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 


계백처 

뭐시 어쩌고 어쪄?!

아가리는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혔어.   

호랭이는 가죽 땜세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세 디지는거여, 이 인간아! 


악다구니를 쓰는 마누라와 아이들을 향해 칼을 치켜드는 계백. 

석상처럼 서 있는 문밖의 팔매, 문밖에서 보는 그림자들, 

방문을 가로막고 서있는 계백, 

마침내 칼을 내리치는 계백의 모습이 방문 밖 창호지에 비친다. 


두 번째, 젊은 화랑들이다. 영화 스토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있었던 일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보니 전쟁이라는 게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36.김유신 사령부 뒤편-아침 

김품일이 10대 아들, 화랑 관창을 불러놓고 얘기 중이다. 

김품일은 관창을 등지고 서 있다.


김품일 

우리는 진골정통의 뼈따구 있는 가문이데이. 

김유신, 김흠순이 같은 가야파 놈들한테 밀려서 되겟나. 

오늘부로 사군이충, 사친이효, 붕우유신, 임전무퇴, 살생유택, 

세속오계 이거 다 개소리다! 

오늘부로 화랑하면 관창! 관창하면 화랑이다! 

이 한마디면 되는기다. 니는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끼야. 


관창 

(의심의 눈초리로) 

아부지, 지금 누가 시켜서 이러는거 아니지예? 


김품일 

하모! 세상에 누가 시킨다고 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 애비가 어딨겠노? 


관창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아부지, 이거 정말 개죽음 아니지예? 


김품일

무신 소리! (코치가 역도선수 뺨을 때리듯 두 손으로 양쪽 뺨을 때리며) 

넌 뜬다! 뜬다! 반드시 뜬다! 내가 보장하마! 

화랑 관창 역사에 길이 남으리! 

관창아, 꿈은 이루어진데이.

그랄려면 니 기냥 죽으면 안된데이. 

정신 바짝차리고 죽어야 한데이! 

폼나게! 비장하게! 장열하게! 

(모션을 취하는 품일) 

이기 중요한기라! 

넌 뜨게 되있어! 틀림없데이. 

안뜨면 내가 니 아들이데이. 

(하는 사이, 반굴이 말에 올라 신라 진영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에잉?! 김흠순이, 문디자슥이 선수치네!


세 번째, 백제의 마지막 병사 거시기. 이름을 남기기를 원했던 계백과 신라의 화랑들과 다르게 끝에 살아남은 한 사람은 이름도 없는 ‘거시기’ 일 뿐이었다. 역사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수많은 개인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56.백제군 진영 식량창고-오후

입구를 임시로 막은 창고에 갇힌 계백과 팔매. 백제장수1,3과 백제병사1(거시기).

모두 죽고 다섯 명  남았다. 우리에 갇힌 맹수들 같다. 

창고 뒤쪽에서 도끼로 개구멍을 파는 장수1. 


계백 

거 날씨 한번 겁나게 덥네 이. 


백제병사1(거시기)

어따, 날이 더워야 나락이 여물지라잉. 


장수1

(도끼로 판 개구멍 앞에서)

장군! 어서 피하시죠.


백제병사1(거시기) 

(공포에 질려 떨면서)

아따 염병허시요잉. 여그서 죽자했으면 죽는거제. 

추접스럽게 시방 머한다요. 깨깟허게 갑시다이. 

옛말에, 호랭이는 죽어서 거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안헙디까? 


계백 

니 이름이 뭐시여? 


백제병사1(거시기)

나 겉은 놈이 이름 냄겨서 뭐더것소 이. 

그냥 거시기라고 알아두쇼! 


이때, 밖에서 ‘계백, 계백 나와라 나오라카이!!’ 함성소리.


계백 

.... 


장수3

장군님, 싸게 피신을... 


계백 

거시기, 자넨 뭣허다 왔는가? 


백제병사1(거시기) 

농사짓다 왔지라,지금쯤 나락이 거진 다 여물었것는디... 

울엄니 혼자서 존나게 고상허게 생겼네 이.


계백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하난 냄겨야 되지 않겠능가이? 

난 거시기 자네를 남기고 싶구만... 

가게, 가서 나락이나 잘 비게


백제병사1(거시기)

워메 장군, 징하시오 이. (하고 목책틈으로 빠져 나가는 거시기) 


계백 

...가자, 외통수에 걸렸으면 싸게 장기판을 걷어야제. 

(칼을 들며) 전~군! 

(일제히 칼과 창을 들면) 공~격! 


영화적 상상이 역사를 바꾸지는 못했다. 재미로 역사를 왜곡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우리 또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자기긍정’으로 오랜 ‘자기부정’의 역사인식에서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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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형’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재미없는 영화다. 시나리오 역시 완성도는 있지만 재미없다. 일부 네티즌의 평대로 추석에 가족과 모여앉아 보면 딱 좋을 영화다. 

‘우리 형’은 무엇 하나 튀는 게 없다. 마지막에 뜬금없이 누군가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상한 점이 한 가지도 없다. TV 드라마를 보듯 카메라는 무덤덤하게 사람을 보여주고 있어 스토리며 대사며 연기며 심지어 세트까지 모두 무덤덤하다.

그래도 이 영화는 소위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것이 감동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느낄 수 있는 가족에 대한 애증을 잘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



아쉬움 둘


신선하지 않다는 약점은 이미 한 차례 지나간 영화에 대한 예의로 살짝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 대신 내용상 참으로 아쉬운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 형’에는 형이 없다.


주인공 종현은 형에 대해 질투이던 경멸이든 끊임없이 감정적으로 관심을 나타내는 데 영화는 정작 형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도 없다. 형이란 존재외에는 그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 인간적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래 씬53에서 화가 나 있는 형에게 동생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평소처럼 대하다가 긴장감이 발생한다. 종현의 ‘야, 버버리, 니 주제 파악 해라’는 한마디는 형의 장애를 비꼰 말로 충분히 어떤 리액션이 있어야 하는데, 형은 그냥 자리를 피할 뿐이다. 종현 입장에서는 도대체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하나의 타인으로 냉정한 시선을 보낸다.



감정적인 영화이지만 형에 대한 거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53.INT.방 안-NIGHT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 형이 몇 장을 넘겨 본다. 미령의 얼굴이 그려 져 있는 그림이 보인다. 몇 장을 넘겨 보다 멈추는 손. 노트에 찍어진 흔적이 보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형.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눈가에 힘이 들어 가더니 갑자기 잡아 째기 시작한다. 마치 이성을 잃어 버린 듯 잡아 째기 시작한다. 찢어 지는 노트와 형의 얼굴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는데 이때 방문이 열리며 종현이 들어온다. 형이 행동을 멈추는데 시선은 찢어진 노트에 고정되어 있다. 종현이 찢어진 노트를 바라 보더니 방바닥에 앉으며

종현 

엄마는 어디 갔노? 


형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종현, 발로 양말을 벗기며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답을 해야 할 꺼 아이가?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종현 양말을 발가락으로 집어 구석으로 던지며


     야, 챠탈레 부인, 라면 좀 끓이라.


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니 뭐하노 지금? 라면 끓이라는 말 안 들리나? 


형  

니가 해 먹어라.


종현 

뭐어? 니 지금 뭐라 켔노?


형  

니가 해 먹으라고 했다. 와? 


종현 (일어나 앉으며)

하, 씨바·니 지금 내한테 게기는 기가? 


형  

니는 내 한테 안 게기나? 


종현(일어서며)  

하, 이기· 야, 니 죽을래? 라면 안 끓이나? 


형 (일어서며)

니가 해 먹어라.


종현 

끓이라?


형    

니가 해라.


종현  

끓이라?


형    

니가 해라. (어색하게)씨발·


종현(형의 멱살을 잡으며)

뭐어? 이기 간이 쳐 부었나? 맞고 싶나? 빨리 안 차리 올래?


(노려보며)

 니가해라.


이때 초인 종 벨소리가 들려 온다. 그대로 멈춰선 형제. 벨 소리가 한동안 들려오고 형이 종현의 멱살을 손으로 힘줘 풀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종현   

야,버버리, 니 주제 파악 해라. 


종현도 자신이 한 말에 놀란 눈치다. 멈칫하고 멈추는 형. 잠시 정적. 형이 크게 소리 내어 문을 닫고 나간다. 종현이 까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종현   

하, 씨바·


심지어는 시나리오에서 형은 이름도 없다. 그냥 ‘형’으로 표시된다. 단지 가끔 어머니나 선생님만이 ‘성현’이라는 이름을 불러준다. 



둘째, 가족이란 의미에 대한 해석이 아쉽다. 


먼저 작가의 가족의 대한 한 마디 문구가 아래 씬56에 있다. 


56.EXT.미령의 동네-NIGHT 

골목 양 옆으로 가로수들이 깔끔하게 정비 되어 있는 부자 동네다. 정리 된 가로수 사이로 놓여진 벤치에 앉아 있는 종현과 미령. 미령이 종현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면 종현의 시선은 반대편 벽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다.


종현   

동네 좋다. 좀 사네. (잠시정적) 느그 오빠야 깡패라메.


미령   

깡패? (한 호흡 쉬고) 듣고 보이 기분 나쁘네·

         니 그 말 할라고 보자 그랬나?


종현  

오빠라고 편들기는· 니 느그 오빠야 싫다메? 


미령

싫은 건 싫은 기고·그래도 가족이다 아이가? 


‘싫더라도 가족은 가족이다’ 라는 것은 ‘가족이란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해야 된다’라는 의미와 ‘가족 구성원은 가족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는 가족의 순기능을 강조한 것으로 필자도 아름다운 전통이자 소중히 여야할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후자에 들어서, 형은 형이기 전에 인간이며, 어머니도 어머니이기 전에 여성이고 사람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어찌보면 종현이 형에게 범하는 모든 무례는 형이니까 이해해 주리라는 전제하에서 자행되고 있다. 그 지방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형이고 엄마고 다 ‘니’라는 호칭을 부르는데 극중에서는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33.EXT.학교 운동장-DAY


운동장을 가로 질러 걸어 가는 어머니와 형제. 어머니가 앞서 걸어 가는데 걸음 거리에 서릿발이 날린다. 그 뒤로 거리를 두고 따라 오는 형제. 


종현(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미안하다.


어머니와의 거리 좀 더 멀어진다. 종현 좀 더 큰 소리로


미안하다~


형은 멈춰 서 종현을 바라보고 어머니는 못 들은 척 걸어간다. 종현 빽 소리친다.


미안하다 안 하나!


형이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 걸음을 멈추더니 뒤 돌아 보며


어머니

뭐하노? 빨리 안 오고·


형이 종현이의 손을 끌자 종현이 형의 손을 뿌리치며 어머니에게로 간다. 형이 뒤 따라간다. 어머니 멈춰 서서 두 아들을 바라보며


성현아, 종현아!(한 호흡 쉬고) 단디 들어라. 다음에도 누가 느그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괴롭히면은 같이 때리주라. 그기 형제다. 알긋나?


형제의 표정이 보이고 이어 텅 빈 운동장을 걸어 가는 모자.


가족이란 이데올로기의 강화자로 여기서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기 형제다’라고 담담하게 내뱉는 어머니는 이후로도 깜짝 놀랄 만할 말들을 한다.

씬 85에서는 ‘느그들 지금 아버지 없다는 거 표 내는 기가 뭐고?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씬 90에서는 ‘아무래도 느그 동생은 니 아버지를 닮은갑다. 나도 참 못된 년이지 남편 없이 새끼 둘 나아 길러보이 그렇더라. 하나는 남편 같고 또 하나는 자식 같은 기라. 종현이는 의지가 되고 니는 자꾸 신경이 쓰이고 그게 섭섭 했는갑다.'... 



‘하나는 남편 같고 또 하나는 자식 같다’라는 말은 분명히 극중에서는 감동적인 대사들이었다.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은 것처럼 호흡을 천천히 하게 한 말들이었지만 반대로 가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좀 무섭기도 하다.



씨앗 하나


필자는 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재미있는 얘기, 기발한 상상, 먹어주는 이야기만 찾아다니던 것에 대한 후회였다. 

이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참 부끄러웠다. 어떻게든 데뷔해 볼려고 하다보니 이미 작품에는 ‘진심’이 빠진지 오래다.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다음 해 뿌릴 씨앗은 먹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이 시나리오를 보면서 작가들이 가슴에 품고 죽을 씨앗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선 필자는 그 씨앗을 ‘진심’이라고 나름대로 답을 내렸다.

영화에 있어서 누구도 하지 않을 고민을 적어도 작가 한명은 해야 한다. 요즘 세상에 웬 진심인가 싶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그 진심이 진부함을 탈피하도록 노력해야함은 물론이다.


작가주의 영화에서 사실 그 작가란 것은 ‘감독’을 말한다. 사실 작가도 못되는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존재하는 한 ‘진심’을 지켰으면 좋겠다.


물론 요즘은 감독들이 전부 시나리오도 쓴다. 이 작품도 안권태 감독이 직접 각본을 맡은 것이다. 지금처럼 보조적인 수단으로 감독이 하잔대로 하고, 기획영화라고 아이템 회의대로 쓰다가는 언젠가는 시나리오만 쓰는 집단은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그래도 없어지기 전까지 최소한의 ‘진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대필 작가가 아니니까... 그것마저 포기하면 안된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Posted by sheis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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