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면서 쓴 첫 번째 시나리오가 ‘솔병초입대명’이라는 말도 안되는 사극이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여 대사가 있는 등장인물이 스무명이 넘었었다. 전쟁도구나 방법이 있는 문헌을 찾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몇 가지 병서와 박물관 유물을 참고했었다. 앞으로 주인공은 두 명으로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는 주위의 충고로 그 뒤로 내리 로맨스만 써댔는데 역시나 필자는 ‘사극’이 좋다. 그 뒤로 로맨틱 드라마, 로맨틱 호러로 장르를 넓히고 있는데 다음은 로맨틱 사극을 써야겠다.


최석환씨가 쓴 ‘황산벌’은 아무래도 전쟁이야기를 풀어가다보니 소설처럼 여기저기로 이야기가 분산이 되어 끝에 힘을 잃은 감이 있는데, 다음 작품 ‘왕의 남자’에서는 제대로 인물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거나 역사를 재해석하는 영화는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해야 영화가 산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계백(박중훈)과 김유신(정진영)에 좀 더 집중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 그래도 이 영화는 감히 꿈꾸지 못할 유쾌한 상상으로 가득 차있다. 각 지방 사투리를 쓰는 상상도, 거시기한 갑옷에 관한 비밀도, 정치적 풍자도, 각 전쟁장면은 다시 봐도 즐겁다.



I. 전쟁


역사의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영화는 필자처럼 무식한 관객이 어디부터 어떻게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정치적인 풍자를 넘어서 어느새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탐색전, 신경전, 맞짱, 심리전으로 네가지 싸움이 차례로 시전이 된다. 시나리오랑 순서는 다르지만 무작정 검과 창을 들고 나가 진법을 펼친 게 아니어서 사뭇 흥미가 있었다. 전쟁 참 복잡하게 하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해 김유신은 아래씬에서 ‘전쟁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라며 이 무지한 후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29.김유신 사령부-오후

모여앉아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김유신, 김법민, 흠순과 장수들. 


김품일

내일이데이 내일! 

지금 저런 짓하고 있을 짬이 없데이.


김흠순

하모! 계백이 아~들한테는 저런거 안통한다카이.


김법민

약속날짜 못지키면 누가 책임 질끼고? 

이거는 참수형감이데이, 참수형! 지금 총공격 해야된다 안카나! 


김유신 

(서늘한 눈빛으로 법민을 보며) 총공격?! 지금 하까? 


김유신,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군막을 뛰쳐나가, 

미친놈처럼 “전군 공격! 공격하라! 전군 총공격하라카이!”를 외치고는 다시 들어와 


김유신 

(비웃으며)니 봤제? 총공격 안하네! 

전쟁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데이. 


김법민 

절차 따지다 황산벌에서 늙어 죽을끼요?!


김유신

느그들은 모린다. 전쟁이 뭔지. 

지금 총공격하믄 그건 몰살이데이.

계백이 지 처자식 죽이고 나온거 보래이. 

그래서 계백이 갸가 무서운거래이. 

갸는 그거 한방으로 병사들 독기를 확 올려 뿐 거 아니가.


김흠순

그람 우얄낀데?! 우리가 집에 가 처자식 다 쥑이고 올까? 

그라믄 전투할끼가?


김유신

가만 있어바라,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선다. 

천존, 계백이한테 장기 한판 두자케라.


전쟁은 코믹하게 진짜 우습지도 않게 전개되다가 드디어는 그 광기를 드러내게 된다. 


44.신라 방패진영 앞-낮 

관창의 베인 머리를 달고 돌아온 말. 

김품일, 아들 관창의 머리가 담긴 보자기를 부여잡고 비통해하고 있다.

그 뒤에 서있는 김유신과 김법민, 김흠순, 천존과 장수들.

관창의 죽음을 맞이하는 병사들의 공포에 젖은 표정.


신라병사2 

김유신이가 불리하면 꼭 써묵는 수법 아이가? 


신라병사3 

저 짓도 한두번이지 저런다고 사기가 올라가나? 


김유신, 아들들을 잃은 김흠순과 김품일의 슬픔을 애써 외면한 채 

흐린 하늘을 보고 있다가... 


김유신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 


김흠순 

행님, 니 미칬나?! 


김유신 

그래 미칬다! 

전쟁은 미친놈들 짓인기야!! 

지 가족 모두 처죽이고 나온 계백이가 제정신이가? 

글마가 미치면 내도 미친다. 

미친 놈한텐 미친 놈이 약인기라! 

니 죽기 싫으면 가만 잇그레이... 

분위기 잡혀가는데 산통깨지 말고. 

(모여있는 화랑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화랑들을 계속 보내!  

꽃은 화려할 때 지는기야! 


싸늘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김유신. 


54.백제군 구령대 앞-오후 

중장갑으로 무장한 기마병과 보병(100명 정도)들을 모아 점검하는 계백. 

계백이 눈짓을 하자 한쪽에서 누군가 백마 한 마리를 끌고 나오고, 

이어 장수1이 칼로 백마의 목을 벤다. 

쏟아져 흐르는 백마의 피를 손에 묻혀 한명씩 차례로 입술에 쓱- 칠한다. 

계백 이하 장수들, 병사들의 얼굴이, 전율이 흐를 정도로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다.

계백, 병사들의 의식이 끝나자 칼을 뽑아들고, 


계백

자랑스런 백제의 아그들아, 

머덜라고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발른거시더냐?

고거슨 바로 죽음의 맹세가 아니더냐?!

사는 것은 불확실한거시다. 

이 징헌 놈의 인간시상에 확실한 것은 딱 하나 뿐이여. 

그것은, 사나이가 미련과 변명을 버리고, 

아쌀하게 거시기하는거다! 

우리 오늘, 여그 황산벌에서, 아쌀하게 거시기해불자!!! 


장수1/병사들

(장수1의 거시기 선창에 따라 병사들 해불자고 복창한다)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거시기! 해불자!....


입술과 얼굴에 붉은 바디페인팅을 한 붉은 악마들의 응원 같은 분위기다.



II. 정치


전쟁은 정치 때문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전쟁을 위해서 정치가 필요하기도 하다. 

전자에 대해서는 당의 힘을 빌어서 백제를 칠 수 밖에 없었던 신라의 정치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일반적으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기 위해 장수들이 펼치는 전략(선)과 전쟁의 전후처리문제 협상(후)을 말한다.

이 영화는 한국사람, 그것도 중등교육이상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 보아야 재미있다. 왜냐하면 전쟁이 필요한 정치적 배경의 설명 없이 바로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래 첫씬에서 각 나라 대표 뒤에 써 있는 글자를 극장에서는 몰라보았으나 집에서 다시 보니 나라의 이름이 아닌가. 의자왕 뒤에는 백제의 ‘濟’, 무열왕 김춘추 뒤에는 신라의 ‘羅’, 연개소문 뒤에는 고려의 ‘麗’, 당황제 뒤에는 ‘唐’ 깃발이 있으니 말이다. 

아무렴 어떠랴 상당히 희화화된 삼국시대 각 나라 대표들과 당황제의 대화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래로 사대주의적 사관에 찌든 우리에게 약간의 쾌감을 준다. 당황제를 향한 연개소문과 의자왕의 발칙한 대사도 우습지만 특히 당황제와 미국 부시의 ‘악의 축(axis of evil)' 발언이 묘하게 겹쳐지며 속이 조끔은 시원해진다.


1.군막 회담장-낮

당이란 로고에서 카메라 트랙 백하면 당황제와 의자왕, 김춘추, 연개소문이 회담을 벌이고 있다.   


당황제 (중국말-자막)

현재 동북아의 긴장은 대당제국이 정한 국제질서를 

고구려와 백제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 모두가 이 황제의 백성일진데, 짐이 부덕한 소치로다.


연개소문 

우리가 와 니 백성이야?!

니들 당나라 몇 년 돼서?! 50년도 아니되지 않았슴메?! 

우리 고구려는 700년 돼서, 700년, 알간! 


당황제(중국말-자막) 

연개소문, 그대가 천하의 질서를 어기려 하는가?!


     연개소문 

질서 누가 정하는 건데??!  


당황제(중국말-자막) 

그 질서는 하늘이 정했고, 짐은 하늘의 아들 천자다! 


연개소문 

니 아바이 당태종이가 형제들 쳐죽이고 황제된 것도 하늘이 정한 질서냐?! 


김춘추 

니 진짜 무식하데이, 황제께선 정권의 철학적 정통성을 말씀하고 안있나? 


연개소문 

정통성? 그래, 나는 쿠데타 일으켜 정권 잡았다 와?! 

김춘추, 니, 반쪽짜리 왕족 주제에, 김유신이랑 짝짜꿍해서 정권 잡지 안아서?! 

의자왕, 니 애비도 서자 아니어서?!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 어딨서? 

떼놈들이 인정해주면 그게 정통성인가?

전쟁은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기야. 


의자왕 

맞제, 고것이 정치적 경륜이제! 


김춘추 

정치적 경륜?! 하루가 멀다하고 쳐들어와 남의 백성 쳐죽이는게 경륜이가?! 

니 놈 왕되고 지난 20년간 우리 신라는 하루도 편할 날 없었데이!! 


의자왕 

아 즉위 초기에 정권장악허고, 국론통일 할라믄 다들 하는거 아녀? 

우리 선수들끼리 지난 야그는 허지 말자. 

  ...(중략)...


 당황제(중국말-자막) 

그만! 짐이 이번에 개입한 이유는... 

(참다못해) 너희들이 막나가니까, 나도 노골적으로 말하겠다. 

강대국이 까라면 까! 


의자왕 

뭘 까라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랑께. 

  

당황제(중국말-자막) 

첫째! 조공문제...

조공은 황제가 정한 국제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약소국들의 의사표시다. 

헌데 너희 백제놈들, 왜 고구려와 짜고 신라의 조공길을 막나?! 


의자왕 

아따 김춘추 저거시 싸가지 없게 노니께...


당황제(중국말-자막) 

둘째! 우리 당나라 기술자들을 돈으로 빼돌려서, 

초강력 쇠뇌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속셈이 뭐냐?! 


의자왕 

그건... 순수민간차원의 과학기술교류라고 보고 받았는디... 


당황제 (중국말-자막) 

셋째! 고구려는 우리 당나라가 극구 만류한 천리장성을 축조해

주변국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연개소문 

이 종간나 새끼?! 내가 성을 쌓던 부수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함 해보자 이기야? 


김춘추

이놈이?! 감히 황제에게...


연개소문 

뭐이 어드레?! 김춘추, 너, 옛날에 내가 뭐라했서. 

고구려,백제,신라가 힘을 합쳐 저 당나라 새끼들 박살내자 아니했슴메?!  

 

당황제(중국말-자막) 

개소리!! 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천하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선포하는 바이다!! 

   

김춘추 

하모, 저것들은 악으 축 정도가 아니라, 악으 덩어리라카이! 


연개소문

무스거?!(벌떡 일어나며)

  ...(중략)...

                  

김춘추 

(의자왕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니는 내 손에 죽는데이!


    의자왕

음마? 시방 선전포고하는거여 뭐여?



전쟁이 정통성 없는 놈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짓거리인지 백성만 쳐죽이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만은 확실히 제대로 표현했다.

아래씬에서의 김춘추의 발언들은 그런면에서 정말로 깜찍하다.


6.금돌성 김춘추 캠프(안)-밤

...(중략)...

김춘추 

언제, 내는 당나라 황제하고 얘기 다 끝났다 아이가?

소정방이는 처남이 맡아주소.

그카고 절대로 소정방이 비위를 거슬리면 안된데이. 


김유신 

와?  


김춘추

황제가 전쟁 끝나면 대동강 이남은 내게 준다켔다.

소정방이가 딴소리 몬하게 그걸 분명히 해라!


김유신

그기 단교?


김춘추

이번 전쟁으로 우리가 뭘 얼매나 얻느냐는 전적으로

대장군이 하기에 달린기라.


김유신

잘몬하면 내 탓이고 잘하면 다 매제꺼네?


김춘추

근데, 대장군 니, 말투 좀 가려하면 안되나?

우리 신라는 다 좋은데, 우아래 없는 말투는 싹 뜯어고쳐야 한데이.


김유신

그기 우리 신라 전통 아니가? 

얼매나 살갑고 좋노... 전하. 


김춘추

됐다 고마, 출발하그라.


김유신 휙 돌아나간다

김춘추, 김유신 나간쪽을 보고


김춘추 

절마 저거...

(법민에게) 이 전쟁은 이미 끝났데이. 

전투는 요식행위고, 인자 전후처리 문제만 남은기라. 


숨어있던 신라협상대표가 나선다. 


    김춘추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곤)

전후처리 협상대표로 너를 따로 보내는 이유를, 니 알제?


신라협상대표 

예, 전하...


김춘추 

내는 이제 김유신이 같은 꼰대들은 안믿는데이. 

니같은 젊은 피를 믿는데이. 

이번 협상에서! 

(의자에서 일어나) 

의자왕의 신병처리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해야 한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의자를 발로 차며) 

의자왕 그 새끼를 쳐죽여가 내 딸내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카이!!  

니는 그것 해내면 출세하는기고, 

그것 몬하면 내 손에 죽는데이. 알것나?! 알것제!! 


협상대표 

(사색이 되어) 

예, 전하.


협상대표를  물러가라고 손짓해서 내보내고  


김법민

내는 완전히 깍두기네... 

                     

김춘추

니는 태자 아이가. 내 담엔 니가 왕이야. 

김유신이 글마가 기회포착하는덴 귀신이데이.

니는 그걸 배워야 한데이.

            

김법민

내는 외삼춘이 무섭다.


김춘추

이번 전쟁에서, 글마가 왜 무서븐지를 배우란 말이다.

니 적은 백제가 아니라 김유신이데이.

...(중략)...


전투는 요식행위라며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후처리 협상부터 시작하는데서 김춘추의 정치 9단 솜씨를 엿볼 수 있지만, 군자가 취할 행동은 아니다. 손자병법에도 ‘전쟁을 하는 방법으로 적국을 손상시키지 않고 항복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며, 격파해서 항복시키는 것은 차선책이다’란 말이 있지 않는가. 애초에 이 전쟁은 목적도 수단도 과정도 후세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 결과론적으로 보아도, 신라가 삼국통일로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고구려의 후예 ‘발해’의 존재가 너무 크지 않은가 말이다.

불손한 후손의 정치적 풍자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쌀배달’이라고 명명된 보급품 지원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13만 대군의 보급품을 대기로 했던 신라의 행동을 두말하지 않고 쌀배달이라고 칭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쌀배달은 이 때뿐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는 조선에게 쌀배달을 시키지 않았던가. ‘징비록’이란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제학 류성룡은 심지어 명나라 사신 앞에 무뤂을 꿇고 눈물까지 흘렸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키듯이 쌀을 달라면 쌀이 오냔 말이다.


53.김유신 사령부-오후 

장군들 김유신을 필두로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법민 

공격은 언제 시작하능교?


김유신 

(생각을 정리하며 뜸을 들여서)

...법민아, 니는 내 조카제?


    

김법민

(머쓱해하며)예.


김유신

흠순아. 닌 내 동생이제?


 김흠순

하모.


김유신

김품일이 닌 법민이 사돈이제.


김품일

예,대장군.


김유신

그러니까 우리는 다 친척이제?

남이 아닌기라.


    법민, 흠순, 품일

(서로 눈치를 보며 의아해하며)

....


    김유신

이중에서 법민이는 왕이 될끼고, 우리는 대신라국의 자랑스런 장군이 되가

법민이를 도울기다. (사이) 우린 당나라를 위해 사우는기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우는 기다. 알긋제?

우린 우리 자신을 위해 살배달 가는기다. 분명하제? 

우린 남이 아니제? 우리가 남이가?!


    법민,흠순,품일

아닙니더!


김유신

인자부터 싹쓸어 버리는기라. 각오됐나?!


법민,흠순,품일

(우렁차게)예!!


뻐꾸기1,2 뛰어 들어오며,


뻐꾸기1 

대장군이 하라는대로 켔드마는... 


뻐꾸기2 

분위기 금방 잡히데예. 


김유신 

욕봤데이. 

(장수들에게) 

됐다. 가자. 인자 우린 이긴다!!

전쟁에는 역시 정치가 중요하다. 세치 혀가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III. 개인의 역사


영화는 대체로 백제의 계백장군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끝까지 영화를 보게 되면 주인공이 김유신임을 알 수가 있다. 아무래도 영화적인 상상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그리되지 않았나 싶다. 

영화는 사극에다가 전쟁까지 있어 수많은 배역들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몇몇의 개인을 지목해 보자. 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했던, 원치 않던 간에 이름을 남기고 죽었다.

첫 번째, 계백의 처자이다. 순순히 죽었으리라는 상상이 약간 빗겨나가며 그동안 영웅적인 행동으로 떠받들렸던 계백의 행동이 목적을 잃는다.


58.계백의 집-밤(14씬 연결, 회상)


계백 

그거 마시고 죽을겨, 내 칼에 죽을겨? 

(벙찐 가족들의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표정) 

이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너희들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어라. 


계백처 

뭐시라고라, 시방 이녁이 그런 말 헐 자격이 있당가요?! 

그러면 우덜이 아이고 서방님, 아이고 아부지, 

이 사약 먹고 디질다 그랄줄 아셨소? 

에끼, 이 냥반! 


계백 

(칼을 치켜들며) 

이 에편네가! 


계백처 

시방, 내 생떼거튼 새끼들헌테 자진해서 디지라고라. 

씨만 뿌려놓고 전쟁터만 싸돌아댕긴 인간이 

이제 와서 뭐시라고라! 


방밖 마당에 구부정히 석상처럼 서있는 팔매. 


계백 

이 예펜네가 환장을...


계백처 

그려 환장했다 왜?

내가 결혼해서 이날 이때까지 악밖에 안남은 년이여! 

옘뱅하고... 이 인간이 니가 해준 게 뭐있다고... 


계백 

이 여편네가 미쳤나?! 


계백처 

전쟁을 하든 말든 나라가 망하든 말든, 

그거시 뭐인데 니가 내 새끼들을 죽여! 

(계백 칼을 치켜들고 죽이려 하자, 계백 아들딸들 계백처 뒤로 숨는다) 


계백처 

니 애비 에미가 살아 있으면, 니 애비 에미도 이렇게 죽일껴? 


그 말에 계백 주춤하고, 


계백

호랭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혔다. 


계백처 

뭐시 어쩌고 어쪄?!

아가리는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혔어.   

호랭이는 가죽 땜세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세 디지는거여, 이 인간아! 


악다구니를 쓰는 마누라와 아이들을 향해 칼을 치켜드는 계백. 

석상처럼 서 있는 문밖의 팔매, 문밖에서 보는 그림자들, 

방문을 가로막고 서있는 계백, 

마침내 칼을 내리치는 계백의 모습이 방문 밖 창호지에 비친다. 


두 번째, 젊은 화랑들이다. 영화 스토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있었던 일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보니 전쟁이라는 게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36.김유신 사령부 뒤편-아침 

김품일이 10대 아들, 화랑 관창을 불러놓고 얘기 중이다. 

김품일은 관창을 등지고 서 있다.


김품일 

우리는 진골정통의 뼈따구 있는 가문이데이. 

김유신, 김흠순이 같은 가야파 놈들한테 밀려서 되겟나. 

오늘부로 사군이충, 사친이효, 붕우유신, 임전무퇴, 살생유택, 

세속오계 이거 다 개소리다! 

오늘부로 화랑하면 관창! 관창하면 화랑이다! 

이 한마디면 되는기다. 니는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끼야. 


관창 

(의심의 눈초리로) 

아부지, 지금 누가 시켜서 이러는거 아니지예? 


김품일 

하모! 세상에 누가 시킨다고 지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 애비가 어딨겠노? 


관창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아부지, 이거 정말 개죽음 아니지예? 


김품일

무신 소리! (코치가 역도선수 뺨을 때리듯 두 손으로 양쪽 뺨을 때리며) 

넌 뜬다! 뜬다! 반드시 뜬다! 내가 보장하마! 

화랑 관창 역사에 길이 남으리! 

관창아, 꿈은 이루어진데이.

그랄려면 니 기냥 죽으면 안된데이. 

정신 바짝차리고 죽어야 한데이! 

폼나게! 비장하게! 장열하게! 

(모션을 취하는 품일) 

이기 중요한기라! 

넌 뜨게 되있어! 틀림없데이. 

안뜨면 내가 니 아들이데이. 

(하는 사이, 반굴이 말에 올라 신라 진영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에잉?! 김흠순이, 문디자슥이 선수치네!


세 번째, 백제의 마지막 병사 거시기. 이름을 남기기를 원했던 계백과 신라의 화랑들과 다르게 끝에 살아남은 한 사람은 이름도 없는 ‘거시기’ 일 뿐이었다. 역사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수많은 개인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56.백제군 진영 식량창고-오후

입구를 임시로 막은 창고에 갇힌 계백과 팔매. 백제장수1,3과 백제병사1(거시기).

모두 죽고 다섯 명  남았다. 우리에 갇힌 맹수들 같다. 

창고 뒤쪽에서 도끼로 개구멍을 파는 장수1. 


계백 

거 날씨 한번 겁나게 덥네 이. 


백제병사1(거시기)

어따, 날이 더워야 나락이 여물지라잉. 


장수1

(도끼로 판 개구멍 앞에서)

장군! 어서 피하시죠.


백제병사1(거시기) 

(공포에 질려 떨면서)

아따 염병허시요잉. 여그서 죽자했으면 죽는거제. 

추접스럽게 시방 머한다요. 깨깟허게 갑시다이. 

옛말에, 호랭이는 죽어서 거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긴다고 안헙디까? 


계백 

니 이름이 뭐시여? 


백제병사1(거시기)

나 겉은 놈이 이름 냄겨서 뭐더것소 이. 

그냥 거시기라고 알아두쇼! 


이때, 밖에서 ‘계백, 계백 나와라 나오라카이!!’ 함성소리.


계백 

.... 


장수3

장군님, 싸게 피신을... 


계백 

거시기, 자넨 뭣허다 왔는가? 


백제병사1(거시기) 

농사짓다 왔지라,지금쯤 나락이 거진 다 여물었것는디... 

울엄니 혼자서 존나게 고상허게 생겼네 이.


계백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하난 냄겨야 되지 않겠능가이? 

난 거시기 자네를 남기고 싶구만... 

가게, 가서 나락이나 잘 비게


백제병사1(거시기)

워메 장군, 징하시오 이. (하고 목책틈으로 빠져 나가는 거시기) 


계백 

...가자, 외통수에 걸렸으면 싸게 장기판을 걷어야제. 

(칼을 들며) 전~군! 

(일제히 칼과 창을 들면) 공~격! 


영화적 상상이 역사를 바꾸지는 못했다. 재미로 역사를 왜곡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우리 또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자기긍정’으로 오랜 ‘자기부정’의 역사인식에서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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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시작은 민망하게


평촌 CGV에서 아침에 ‘왕의 남자’를 보는데 민망해서 죽을 뻔 했다. 옆자리에 환갑을 넘긴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윗 입을 채워주랴, 아랫 입을 채워주랴’ 하고 공길이 물구나무를 서서 다리를 쫙 벌리는데 턱이 빠지는 줄 알았다. 

엄마가 옆에 없어도 민망했을까? 

다른 영화에서의 침실에서 혹은 차안에서 벌이는 정사는 그것이 오럴이든 애널이든... 쓰리썸이든 스와핑이건 그것은 관습적인 것이다. 그 장면을 열쇠구멍으로 훔쳐보든 당사자가 되어 즐기든 이것은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통상적인 베드신보다 ‘왕의 남자’에서 그 패거리들이 벌이는 놀이마당이 더 낯 뜨거운 것은, 감히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공개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이다.

관음의 시선이 아니라 마치 관객자신이 그 놀이마당의 한 구석에 자리를 펴고 앉아 관중이 되어 까발려 질 수 없는 것을 왕과 군중 앞에서 목격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친척들 앞에서 연인과 섹스를 하거나, 법정에서 재판관 앞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 일종의 금기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 폭로되는 금기와 더불어 절대 권력자가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리는데서 민망함을 느낀다. 연산은 녹수와는 서로 반말을 일삼고, 신하의 멱살을 잡고, 선왕의 후궁들을 죽이고 심지어 남색까지 즐긴다. 한국인의 무의식 저 아래 ‘군사부일체’가 깊이 박혀 있어서 공개적인 정사보다 그것이 더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다 더니 영화 초반에서 느끼는 민망함은 극이 진행되면서 드디어는 쾌감으로 바뀐다.



二. 하위를 자쳐하는데 왜 고급스럽게 느껴지나


현재의 영화를 고급문화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노블레스 계층만 누리는 것이 아닌 7천원과 한두 시간 정도의 여유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이자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십 명이 참여하여 몇 십억씩 투자되는 하나의 노동 집약적인 문화 산물을 하위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영화 자체도 동시대의 가치체계와 시대양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픽션일지라도 하나의 역사적인 가치를 지난다.

‘왕의 남자’는 왕 앞에서 해괴망측한 놀이마당을 벌이며 스스로 하위를 자쳐하는데, 이상스럽게도 관객은 그것이 고급스럽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연산군이 패거리들의 짓거리를 바라보듯이 관객도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개의 다른 공연을 보기 때문이다. 장생과 공길이 한양에서 새 광대패와 만나서부터 벌이는 놀이마당이 다섯판이나 되고, 그중 궁궐에서 벌인 판이 세 판이다. 

바로 왕을 웃기지 못하면 목이 달아나는 왕을 능멸한 첫 번째 판(씬22), 권력을 잡은 조정대신을 능멸한 두 번째 판(씬34), 연산의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세 번째 판(씬53) 들은 모두 완성도 높은 ‘마당극’자체이다. 궁에서 벌어진 마등극은 점점 완성도가 높고 화려해 지는 동시에 긴장의 폭이 깊어진다.


22. 궁 연회장 - 낮

...(중략)...

소극이 끝났는데 연산은 끝내 웃지 않고 분위기 완전히 가라앉아 있다.

장생, 사색이 된다.

뒤에 선 육갑 칠득 팔복, 넋을 잃고 있다.

그때 공길이 갑자기 장생에게 쪼르르 다가가 즉흥적으로 에드립을 친다.


공길

그 애가 당신 씬 줄 아슈?


장생, 예정에 없던 공길의 행동에 당황한다.


장생

뭐? 너 왜 이래?


공길

(에드립을 계속 이어간다)

흥, 다 아는 소문을 당신만 모르는 구나?!


장생, 뒤늦게 공길의 에드립을 깨닫는다.

...(중략)...


연산

(공길에게)

고개를 들어라.


공길, 고개를 든다.

연산, 땀에 촉촉이 젖은 공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녹수, 공길을 바라보는 연산을 주목한다.


연산

니 이름이 뭐냐?


공길

공길입니다.

...(중략)...


34. 궁 연회장 - 낮


...(중략)...

광대들 한데 어울려 신명나게 춤을 춘다.

공길, 여장을 하고 나타난다.

연산, 공길이 나타나자 몸을 앞으로 숙이며 관심을 보인다.


공길

(봉투를 들이밀며)

제 남편 좀!


장생

이러시면 다치십니다.


공길

(떨어진 봉투를 다시 들이밀며)

제 정성입니다. 받아주세요.


장생

(봉투 안을 확인하고)

어허, 이러시면 다친데두.


공길

(봉투를 호주머니에 들이밀며)

제발 한 번만 받아주세요.


장생

(손을 뿌리친다)

나를 어찌 보고 이러시오.


공길, 봉투를 호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이 바지춤 속으로 손이 들어간다.


장생

어허.


공길

역시 소문대로 위세가 대단하십니다.


장생

(흥분해서 몸을 비비꼬며)

좀 살살. 아! 어찌 이다지도 귀한 선물을.


공길

내 손이 좀 합니다.


연산, 공길의 연기에 폭소를 터뜨리며 반응한다.

녹수도 자지러지게 웃는다.

공길 장생 육갑 칠득 팔복, 즐거워하는 연산의 웃음에 희열에 찬 표정이다.

중신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뭔가 불안한 표정이다. 

형조판서 윤지상, 눈에 띄게 중신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안색이 안 좋아진다.

연산 갑자기 연회장 중앙으로 뛰어든다.


연산

(왕관을 벗어 장생에게 내밀며)

받아 주십시오.


중신들 경악한다.

광대들도 굳는다.

...(중략)...

인물 설정이 광대인 탓도 있겠지만, 장생과 공길은 영화에서 외줄 위 공연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지막으로도 외줄위에서 공연 아닌 공연을 한다. 그냥 말해도 되는 장면을 공을 들여 손 인형으로 말을 하는 성의를 보인다.


三. 장생과 공길은 왜 수동적으로 보이는가

한양까지 찾아와서 광대극을 벌이고 드디어 왕 앞에서 큰 판을 벌이겠다고 나선 이는 분명 장생이지만, 그는 역사의 쳇바퀴 속의 부속품처럼 사실상은 수동적인 인물이다. 장님이 되면서까지 공길을 감싸 안고 세상을 초탈한 듯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도 왕의 손에 놀아난 셈이다.

흔히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그들의 노력여하에 관계없이 숙명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것과 비슷하다. 

장생이 공길을 탐하던 양반을 죽이고, 왕을 조롱하는 광대놀이를 버젓이 저잣거리에서 벌이고, 왕 앞에서 눈썹하나 깜짝 안하고, 공길에게 덧씌워진 누명까지 뒤집어 쓴 것은 본인이 전부 결정하고 능동적으로 사건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끝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신들의 ‘신탁’에 따라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것과 같다. 바로 역사에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 점이 수동적으로 보이게 한다.

연산은 그에 반해서 좀 더 적극적이고 새로운 이미지를 보이지만, 이야기 핵심에 흐르는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통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국c사시간에 들은 이야기들... 연산군에 관한 모든 편견이 그대로 다 드러난다. 역사는 원래 승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죽어서 ‘군’으로 낮춰진 수치를 당했던 그에 대해서 영화는 어떤 특별한 시선을 보내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인간으로서 동정할 뿐이다.


四. 후회하지 않는다(不悔).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이 영화를 보며 필자도 분명히 열광하며 웃고 울었다. 우직한 장생의 성품에 반하고 화려한 색채에 가슴 설레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공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연산의 불행을 읽고 동정했다. 

하지만 감정이 가라앉은 후 다시 이 고급문화를 표방한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가슴에 구멍이 하나 생긴 이 기분. 왜 이렇게 공허할까? 이 공허감이 이 영화의 메시지 일까?

필자도 연산처럼 그저 놀아보자는 판에 울고 웃은 것인가.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한 판 놀이에 신명나는 놀이에 혹해버린 것일까.

아래 79씬에서는 공길과 장생은 세상을 ‘반 허공’이라고 말한다.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광대로서의 고단한 삶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연산의 삶과 겹쳐진다.


79. 궁 연산 처소 -밤


낮은 병풍.

그 앞에 연산 앉아 있다.

병풍 뒤에서 구슬프지만 아름다운 풀피리 소리 들려온다.

풀피리 소리 멈춰지고,

병풍 위로 손 인형 하나가 올라온다. 장생 인형(a)이다.

장생 인형, 병풍 위에 털썩 걸터앉는다.

공길 인형(b), 병풍 위로 고개를 삐죽 내민다.

공길 인형, 주춤거리며 다가와 장생 인형 옆에 와서 앉는다.

나란히 앉은 두 인형 화면 가득 잡힌다.

 ...(중략)...

춤을 추다 병풍 모서리에서 공길 인형이 외줄을 탄다.


공길(off-sound)

(a)아래를 보지 마.

(b)무서워.

(a)줄 위라고 생각하면 안돼.

줄 위는 반 허공이야.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반 허공.


이 영화는 인생이 반허공의 실체가 없는 텅빈 공간이며 그 안에 사는 각자의 삶은 ‘눈이 먼’ 소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래 씬82에서 항상 묵묵히 세상풍파를 헤치고 나가던 당당하던 장생은 진짜 장님이 되어 그동안의 삶의 회한을 이야기하며 외줄위에서 마지막 판을 벌인다.


82. 궁 후원 연회장-낮


...(중략)

장생, 경사진 줄을 올라 외줄 위 끝에 선다.


장생

어허~ 내, 눈이 멀어 줄 위에 올라서니,

이 색다른 맛일세!


장생, 줄 위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금방 떨어질 듯 휘청거린다.

공길, 불안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장생을 본다.


장생

(아슬아슬하게 줄 위를 걸어 나가며)

내, 실은 눈멀기로 말하면 타고난 놈인데,

그 얘기 한번 들어들 보실라우?

어릴 적 광대패를 첨보고는 그 장단에 눈이 멀고,

광대짓 할 때는 어느 광대놈과 짝 맞춰 노는 게 

어찌나 신나던지 그 신명에 눈이 멀고,

(울컥 하는 걸 겨우 참으며)

한양에 와서는 저잣거리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엽전에

눈이 멀고,

얼떨결에 궁에 와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그렇게 눈이 멀어서...

볼 걸 못보고,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 가는 걸

못 보고. 그 마음이 멀어져 가는 걸 못 보고. 

(사이)

이렇게 눈이 멀고 나니 훤하게 보이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도 그걸 못보고.


주인공 장생이 다시 광대로 태어나겠다고 말한 것은, 지나간 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일장춘몽의 허무한 인생을 원망하지도 않고 미화도 하지 않는다. 다만 ‘징한 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이라고 읊조릴 따름이다. 관객은 그들이 후회하건 후회하지 않건, 세 명의 광대 -- 장생, 공길, 연산 --의  비극적인 삶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공허한 인생살이 ... 필자도 후회하지 않는다.


82. 궁 후원 연회장-낮


...(중략)

장생, 반동을 멈추고 줄 위에 바로 선다.

공길도 선다.


장생

넌 죽어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프냐?

양반으로 나면 좋으련?


공길

아니, 싫다!


장생

그럼 왕으로 태어나면 좋으련?


공길

그것도 싫다!

난...

광대로 태어날란다.


장생

이 년, 그 광대짓에 목숨을 팔고도 또 광대냐?


공길

그래 이놈아. 그러는 네 놈은 뭐가 되련?


장생

나야, 두말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


사람들, 연회장에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인서트] 

연회장으로 닿는 산자락을 넘어 연회장으로 밀려 내려오는 반정군들. 이를 보는 연산.


공길

그래!

징한 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광대로 다시 만나 제대로 한번 맞춰보자!


장생

(허리춤을 풀며)

지금 한번 맞춰보면 안될까? 


연산, 웃음을 터뜨린다.

연회장의 사람들 모두 도망가고 연산과 녹수만 남는다. 

녹수, 겁먹은 표정으로 반정군들과 웃는 연산을 번갈아 본다.

홍내관 다급하게 달려와 녹수를 끌어낸다.

녹수, 연산에게 미련이 남는 듯 주저하다 도망간다.

도망가다 반정군의 칼에 맞아 죽는다.

 

공길과 장생, 줄을 힘껏 튕기더니 높이 몸을 띄운다.

시간이 멈춘 듯 화면 정지한다.

각본: 최석환 / 감독: 이준익



** 이글은 제가 온라인 영화비평 네오이마주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6년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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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골프 연습장

...(중략)...

병운   어. 앉어 희수야. (웃으며) 갑자기 와서 돈을 갚으라니까, 저도 방법이 없잖아요. 


너무 자연스럽게 사정 얘기를 하는 게 더 민망한 희수, 


최여사   (싱긋 웃으며) 지금 당장은 백만원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괜찮겠어요?


백만원? 이렇게 선뜻? 희수, 뭐라고 대답 할지 몰라 병운을 흘끗 쳐다본다. 


병운   (당당하게) 뭐, 대충 그 정도도 괜찮지? 

희수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 


최여사, 검은 양복의 남자에게 손짓을 하면 남자 밖으로 나간다. 


병운   웬만하면 이렇게 와서 돈 달라고 할 친구가 아닌데,, 

        사정이 딱한가봐요.. 좀 도와 주세요.. 


최여사, 희수를 물끄러미 본다. 

희수, 뻘쭘해서 시선을 돌린다. 


최여사   가여워라.. 이렇게 이쁜데.. 

병운     아, 여사님 드리려고 선물 가져 왔어요. 짜잔. 


하면서 꺼내 놓는 건, 99% 카카오 쵸코렛, 희수의 차에서 슬쩍 한 것. 

희수, 병운을 흘겨 보는데, 


최여사   (초코렛 통을 만지작 거리며) 99%..... 어쩐지 슬프네..

병운     사는게 그러네요. 제가 여사님 한테 딱 1% 모자란 것 처럼요...

...(중략)...


이런 인간을 딱 세 명 정도 알고 있다. 


첫 번째 K군. 이 남자의 나와바리는 별다방이다. 강남점 충무로점 신촌점 등등의 별다방을 노트북 하나와 카메라 하나를 들고 다니며 하루종일 죽때린다. 물론 여자 알바생과 농담따먹기는 필수과정이다. 그런 K군 연애할 때는 5천원짜리 달랑 하나들고 돌아다니며 애인한테 빌붙는 주제에 가리는 것은 많다. 영화속 남자처럼 햄버거는 꼭 커팅을 해달라고 하고 세트에 음료수도 다른 것으로 바꿔 먹는다. 라면을 먹을지언정 커피는 꼭 제대로 된 것을 먹는 이들. 돈만 생기면 자기치장에 바빠 정작 사람 만나도 밥값은 못 내나보다. 남한테 빌붙기를 십수년. 급기야 결혼해서 와이프에게 빌어먹더니 결국에 바람피다가 이혼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두 번째 D군. 모임에서 만나면 내 이름을 수십번도 더 부른다. 누구야 누구야. 말끝마다 이름을 불러대며 친근함을 표시하는데 솔직히 싫지는 않다. 만난지 한시간 안이면 생판 남도 금방 누나 형 동생을 만드는 막강 친화력을 가진 D군. 술자리에서 ‘나한테 시집와라 평생 글만 쓰게 해줄게’ 해서 사람 놀래키고는 바로 몇 분 후에 또 다른 여자한테 열올리고 있다. 친분을 과시하며 가끔 전화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때에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항상 2% 진심이 부족해 보이지만 다른 허허족들이 반백수로 남한테 빌붙어 사는 것에 비해서 나름 직업을 가지고 사는 D군. 아마도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현실은 외면할 수 없었나 보다.


세 번째 M군. 이분 또한 만만치 않은데 사람은 좋았다. 바람기도 없고 진실함도 있어보였다. 내가 지어준 별명이 ‘인의 장막’이었는데 정말로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을 초월한다. 하루저녁에도 두탕씩은 뛰는 것 같았다. 특이점이라면 그 ‘인의 장막’을 치는 인간들이 전부 남자라는 것. 직종도 다양한 남자들은 M군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사람이 좋았다. 마음이 통하는 느낌. 참 좋았다. 문제는 경제관념. 분명히 경제력이 아닌 경제관념이다. 몇 번 술자리동안에 술값 한번 내는 것을 못봤다. 게다가 술먹자고 불러내놓고 딴 사람한테 술값 계산시키는 거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멋진하루>에는 이런 K, D, M을 전부 합쳐놓은 것 같은 남자가 나온다. 조병운. 350만원을 당장갚으라며 달려온 옛애인에게 인상 한 번 구기지 않는다. 오히려 옛애인에게 무슨일이 있었냐며 걱정까지 해주는 여유를 보이시며 애인차를 얻어타고 이여자 저여자를 만나며 돈을 갚으러 또 돈을 꾸는 남자.


영화를 보다보니 진실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K군보다는 나은듯 싶었다. 능력만 있으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볼만한 성품을 지닌 M군에 가까운 것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이 없으면 죄인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 그것을 어쩌랴. 이 남자를 더 처량하게 하는 것은 돈을 꾸러 다니거나 애인차를 얻어 타는 것이 아니다. 주차비를 내야할 때, 찻값을 계산할 때, 패스트푸드점에서 자기 것만 달랑 계산하고 돌아서는 옛애인 앞에서 지갑을 꺼내야 할 때다. 


#23. 맥도날드

...(중략)...

희수   (만원짜리 하나를 카운터에 내려 놓으며) 빅맥만 계산해 주세요 

병운   치사하게...


cut to 


햄버거가 담긴 쟁반을 들고 걸어오는 병운. 

희수, 먼저 가서 앉아 있다. 

...(중략)...


극에서는 소위 그 품위 유지비는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아마도 더 가난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가 몰락한(?) 중산층을 그쯤에서 표현한 것 같다. 전세도 빼고 달랑 가방 하나들고 이집저집을 전전하는 초라한 행색의 그.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봐도 대충 돈 몇만원만 들고 다니는 게 뻔히 보이는 것을. 하여튼 이 남자 그래도 좋다고 쉴새없이 떠든다. 이런 허허족의 술책에 빠져들지 않는 여자 희수. 그녀는 무슨 일인지 일년이나 지나 시점에서 어떻게든 돈을 받겠다고 우격다짐으로 나온다. 영화에는 약간 다른 씬 하나를 보겠다.


#54.견인차 보관소 앞 

...(중략)...

희수   무슨 소리야?

병운   나 없는 동안에도 죽- 잘 했을거라구.. 

        니가 뭘 했건,, 그게, 최선이었을거야..  


희수,,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다.. 


병운   안심이 돼서 좋아 한다니, (피식) 취향, 심하게 마이너 해.. 그치? 

희수   .. 왜,, 다 잘 사는거야?

         왜,,? 어떻게 그렇게,, 다들,, 웃는거야? 

병운   응? 무슨 말이야? 

희수   병운,, 씨.. 말야.. 

         나,,, 병운씨 좋아했지만,, 결혼 상대론 아니라고 생각했어..

병운   (농담) 내가 어디가 어때서?

희수   (진지하게) 당연 한 거라고 생각했어. 

...(중략)...


뜬금없이 병운을 버렸던 것처럼 결혼상대자도 버렸다며 그게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희수. 미즈넷같은 삼류소설에나 나올법한 온갖 이야기가 나오는 사이트에서 손꼽는 최악의 남자리스트를 보면 바람피는 남자, 무능력한 남자, 마마보이인 남자, 여자 때리는 남자, 등등이 있다. 그중에 미혼여성이 손꼽는 리스트에 드는 게 바로 ‘돈 꿔가는 남자’이다. 나 아는 사람 하나도 몇십만원을 꿔줬다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내가 얼마나 길길이 뛰었던지.  어째서 차까지 몰고다니면서 부모님 번듯하게 살아계시는데 돈을 꿔갈까. 그리고 갚지도 않고 잠수를 타는 걸까. 이게 영화에서 보면 병운의 처지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게 희수의 입장에서 보면 병운은 헤어나지 못하는 아주 아주 나쁜 꿈이나 마찬가지다. 희수는 자기도 직장을 관두고 형편이 좋지 못하지만 뭐하고 사는지 여기저기 빈대붙으면서도 헤헤거리는 병운이 밉게 보인다. 그래서 왜 이렇게 잘살고 있는 건지 왜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가고 급기야는 화를 낸다. 사실 돈 좀 없다고 이마에 내천자 그리고 다 산 사람처럼 굴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도 좋은게 좋은 거라는 허허족이 되가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 이글은 제가 네이버카페 월간시나리오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9년1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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